“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루카 7,9)
예수님이 표현한 말은 상당히 수위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어느 불교 신자가 하는 선한 행실을 보고 교황님이, ‘나는 가톨릭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도대체 백인대장이 드러낸 믿음은 과연 무엇이었길래 예수님이 그토록 경탄해 마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시작은 ‘청함’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청할 줄을 모릅니다. 아니, 청하긴 하지요 하지만 시작부터 잘못되었습니다. 백인 대장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루카 7,3)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 청한다 하지만 실은 부모 자신의 위신을 위해서 청하는 속셈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못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녀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청원의 진솔함을 이미 느꼈기 때문이지요. 헌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백인대장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이 수고하시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 이유가 놀랍습니다. 그는 거룩한 일의 원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가 백인 대장으로서 휘하의 사람들에게 명령할 권리가 있으니 예수님도 그리 하실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기에 눈에 보이는 것을 찾습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다니다가 엉뚱한 것에 빠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주에 빠지고, 타로 카드에 빠지고, 그리고 엇나간 이교에 빠지곤 하지요. 왜냐하면 눈 앞에 보여주는 것에 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기꾼들은 눈 앞에 확실히 드러내어 보여주지요. 그것이 큰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분의 능력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이루어지는 능력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기에 믿는 것이지요.
백인 대장의 믿음은 그 어느 이스라엘 사람보다도 더욱 굳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그 믿음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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