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1코린 9,23)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곧 복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이 명사로 표현되면서 마치 어떤 책이나 물건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복음이라는 것은 곧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는 그 자신이 기쁜 소식을 체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즉 기쁜 소식을 경험하여 기쁘고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지닌 것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물건은 원래의 주인에게 가야 합니다. 사진기는 전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으라고 있는 것이고 피아노는 그것을 연주하라고 있는 것이지 고가의 가격표를 붙인 채로 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 즉 복음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원들은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그 기쁨은 세상이 보장하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은 쌓고 모으고 또 모은 것을 소비하면서 기쁨을 누리게 유도합니다. 그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칩니다. 남들보다 위에 올라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또 그들에게 일을 시켜 자기는 편하게 놀면서 기쁨을 누리라고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성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기만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해서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요트를 사서 바다에 띄워 놓을 수 있겠지만, 그리고 그 안에서 고급 양주를 마시고 온갖 이성을 돈을 주고 구해서 꽉꽉 채워 놓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쾌락’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쾌락은 훗날에 더한 목마름을 가져다 주지요. 그래서 그런 쾌락을 누리려는 사람은 점점 더 그 쾌락에 ‘중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본질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이 가졌지만 갈수록 사랑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시대에 복음은 더욱 활발하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끼고 가서 설교를 한다고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지 ‘이 책 들고가서 읽어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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