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코린 7,29)
사도 바오로 때에 얼마 남지 않은 때가 2000년이 넘도록 왜 끝나지를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학교에서 숫자와 역사를 배우면서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흘러가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즉 지금은 2016년이고 0001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발전이라는 것을 기술의 발전, 문명의 개화라는 식으로 생각을 하니 이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왜냐면 지금 쓰는 컴퓨터가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아예 존재하지를 않았고, 지금 쓰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는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개선된다’라는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조선시대나 신라시대에는 사람들이 인터넷도 자동차도 없이 아주 미개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은 외적으로만 진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적으로도 진보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파트가 생기면서부터 우리는 하나의 건물 안에 모든 것을 갖추고 살아가며 서로 나눌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즉 기술의 발전과 부유함이 우리를 더욱 각박하게 만들어 버리는 셈이지요. 우리는 부족할 때에 서로 나눌 줄 알았지만 오늘날 각자가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모두 갖춤으로써 서로 나눌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내면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과거보다 못한 생활을 오늘날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전기 자동차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더 선해지거나 인내심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더욱 조금해지고 인내심을 잃어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때는 단순히 겉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의 채워짐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알고 그분에 대해서 배우는 사람은 그 내면의 때를 채워가는 것이지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놀이가 있고 자신들의 장난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 되고 나면 그때의 것들을 모두 내려놓게 됩니다. 우리는 더이상 구슬치기를 하지 않으며 딱지를 소중히 여기지 않지요. 왜냐하면 그 때가 흘러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차를 사고 취득세를 내야 하고 부동산을 마련해고 그것을 책임감 있게 운영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아이의 때가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해가는 과정 중에 누군가는 ‘아이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특히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지나가는 때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린 시절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던 딱지를 이제는 원하는 이에게 내어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 7,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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