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9,26)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 같이 자랑스러운 분을 우리가 어떻게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냐? 그래서 너는 지난 번에 외인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홀로 성호 긋기를 잠시나마 주저한 것이더냐? 아, 그리고 지난 휴일 동안 네 친척들과 모인 자리에서 성당에 갈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넌 가족과 함께라는 미명 하에 너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했었지. 그리고 네 아내가 하는 속된 생각을 앞에 두고 충분히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과연 너는 나를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단 말이더냐?
우리는 일상 안에서 수많은 도전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선택을 하게 되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 안에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요. 우리의 삶은 두 방향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불이익’을 겪게 됩니다. 남들이 다 뇌물을 받고 사정을 봐주며 일하는데 홀로 그러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이들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복음에 온전히 눈뜨지 않은 미숙한 상태라면 그 미숙함 때문에 용서 받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질책 당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아직 배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우리의 탓이기 때문이지요.
신앙은 단순히 우리의 여가시간을 투자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보다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중요한 선택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차원을 넘어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보이는 분으로 드러나셨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과학과 문명의 시대에 종교는 일종의 과거의 유산으로 취급을 당합니다.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위인일 뿐이고 지금은 미이라가 된 듯이 생각을 하지요.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실천’해 본 사람은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 실제적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의 허황됨을 잘 알고 있지요. 세상은 눈을 자극하고 귀를 자극하고 촉감을 자극해 보이는 것들을 현실처럼 느끼게 하지만 결국 그 안에는 독소를 감추고 있어 우리를 속이기 쉽습니다. 반면 신앙은 외적으로는 초라해 보이지만 그 안에 실제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실제로 곁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분은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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