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루카 6,46)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당에 가서 미사를 참례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느님의 명을 실행한다고 생각하지요. 그 말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그냥 영화 보듯이 혹은 학교 출석하듯이 갈 수도 있고, 또 다른 한 편으로 진심으로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찬미를 드리기 위해서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그저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고 후자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을 양로원에 모시는 것으로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도 같은 행위 속에서 두 가지 면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모시기 성가시고 귀찮아서 떼어 내고 갖다 버리듯이 거기에 맡겨 스스로 안도하기 위한 이기적인 행위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본인이 집에서 모실 상황이 정말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부모님께서 다른 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좋아하셔서 그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10계명 조목 하나하나마다 서로 양분되는 속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것을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볼리비아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니고 서로 사랑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부유한 나라에 살면서도 서로 다가서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탐욕에 가득 찬 이기적인 인간이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것이 하늘나라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은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엄청난 돈을 준다고 자동으로 선행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 엄청난 돈은 나의 양심의 불을 끄기 위한 가식의 행위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이, 그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이는 내적으로 점점 준비가 되어 갑니다. 그는 십자가를 일상 안에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내적 힘을 길러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가 성장의 마무리에 이르게 될 때에 그 어떤 시련도 그를 넘어뜨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튼튼한 두 다리로 서서 다른 수많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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