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술을 마시면 무언가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적으로 얻는 것은 중독으로 인한 건강의 악화와 관계의 파괴입니다. 나아가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술, 즉 값비싼 술을 향한 집착으로 인해서 내면에 탐욕이 자라나게 됩니다. 이처럼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게 내면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은 성가신 일처럼 보입니다. 내 재물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의 소중한 돈, 내가 좋은 옷을 한 벌 더 살 수 있는 돈을 공연히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훗날 우리가 자선에 보탠 돈이 커다란 내적 보화가 되어 돌아온다면 어떨까요? 상황은 정반대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일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좀처럼 살펴보지 못합니다. 올바로 보지 못하니 올바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지, 어떠한 것에 더 마음을 두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공연히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맙니다.
서로 다투는 이유 가운데 대부분은 ‘재물’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이 주변에 둘러서 있는 것 같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를 서로 다투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신뢰를 둔다면 성실히 일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만일 제가 볼리비아에서 한 고생과 지금 신설 본당을 위해서 하는 고생 이후에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도움을 충분히 얻는다면 나는 세상 안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받을 상을 다 받은 셈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저는 헌신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보상이 없어도, 행여 일이 틀어져서 모든 질책이 저에게 떨어지더라도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지요.
서로 싸우는 사람들의 내면 안에는 ‘자기 자신’이 들어있지 ‘하느님’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죽도록 싸우는 이유는 ‘불의’가 세상 안에서 ‘정의’로 뒤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순교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들에게 ‘복되다 순교자여’라고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영원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한낱 찰나의 존재가 그것을 좀처럼 가늠할 수 없지요. 다만 깨달은 이들은 그 영원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억울한 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세상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분노하고 억울함에 차 시간을 보냅니다. 아닙니다. 세상 안에는 여전히 누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할 때에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잃고서야 그것을 깨닫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이 생도 우리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흘러가고 나면 타고 남은 재보다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혼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찾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기쁜 삶을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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