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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의로움과 불의


사람들은 선과 악에 대해서, 의로움과 불의함에 대해서 사실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의로움을 행한다고 하면서 불의를 행하곤 하지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선은 ‘자신에게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선은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좋은 것이 남에게 나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사람들은 의로움을 ‘정해진 것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율법적인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자칫 소중한 것을 망가뜨릴 수 있는 편협한 의로움이지요.

진정한 선과 의로움은 하느님에게서 비롯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참으로 선하시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선과 의로움은 지극히 부족하고 단편적인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향할 때에, 그분의 진리와 사랑에 머무를 때에 모든 것은 선한 것이 됩니다. 또한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있을 때에, 하느님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머무를 때에 모든 것은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도록 합니다. 관제탑이 있고 비행기들이 공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헌데 안개가 끼어 좀처럼 공항이 보이질 않습니다. 다만 관제탑은 레이더가 있어서 모든 항공기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지요. 통상적으로 왼쪽으로 접근해서 오른쪽으로 선회해야 하는 것이 일반인데 한 비행기가 전혀 다른 쪽으로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왼쪽에서 정상적으로 오는 비행기가 무전을 합니다.

“관제탑, 여기는 1호기, 지금 공항에 접근 중이다. 방향을 알려달라.”
“1호기, 1호기. 오른쪽으로 회전해서 내려오라.”

이 말을 듣고 오른쪽에서 오던 비행기가 대답을 합니다.
“관제탑 여기는 2호기, 그럼 우리도 오른쪽으로 회전하면 되는가?”
“안된다. 2호기는 왼쪽으로 선회하라.”
“1호기에게는 오른쪽을 지시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하지만 2호기는 왼쪽으로 돌아야 한다.”

오른쪽이라는 방향은 비행기의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입니다. 헌데 오른쪽을 법칙으로 만들어 버리면 수많은 비행기들이 추락해 버리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공항에 들어오는 것이지 ‘메뉴얼’ 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지요.

바오로 사도는 과거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하게 박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에게는 율법이 최고였고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는 율법을 어기는 악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만 해도 방향성을 올바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이들인지를 지켜보기보다는 자신이 마음 속으로 정해 놓은 선을 지키는 데에 열중한 셈이지요.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진정으로 선한 이들을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훗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스스로 하는 일을 깨닫게 됩니다. 즉 자신이 박해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진리와 선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선한 이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비로소 ‘방향성’에 눈을 뜬 것입니다. 진정한 의로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여전히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상정한 의로움 속에서 살아가면서 진정한 의로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었고 그분의 외아들은 의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구원을 선물하셨지요. 하느님이 바라신 것은 그저 소위 율법적으로 경건한 사람들끼리 오염되지 않으면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다니셨고 어둠에 속한 이들을 구하려고 하셨지요.

무엇이 선입니까? 무엇이 의로움입니까? 아직도 분간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선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온유하며 평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선입니다. 헌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내세우면서 그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라고 우기면서 서로 다투고 싸우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헐뜯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선도 모르고 의로움도 모르는 것이지요.

댓글

Unknown님의 메시지…
저의 상황에 맞는
말씀들이 가끔 놀라곤 합니다.

저의 인간관계성안에서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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