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루카 8,21)
먼저 사람들은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들음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들음은 높은 곳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겸손’이 없으면 ‘들음’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적는 글만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저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자기 스스로 하는 생각이 제가 적는 것보다도 훨씬 고상하고 드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시당초 저에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때로 흘끔 흘끔 저를 감시하듯이 바라볼 순 있어도 정말 마음을 열고 제 글을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자기 생각 안에서’ 저보다 한참 위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듣는 것이 약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단 한 번 읽어 보아서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입니다. 좋은 책들을 두류 섭렵했으니 이미 많은 것이 자신들 안에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하느님마저 다 파악했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보다 위에 있는 이들이고 교만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듣지 못합니다. 스스로 듣는다고, 아니 이미 많이 들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하나도 들은 것이 없는 셈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듣는 것은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들을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귀로 들어오는 소리 안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옷을 비닐에 싸서 물에 넣으면 물을 전혀 흡수하지 않습니다. 옷은 그대로 물에 넣어야 하고 푹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물을 잔뜩 머금게 됩니다. 우리도 우리를 둘러싼 교만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또 푹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을 흡수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실행’입니다. 듣는다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나면 들은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헌데 이 구체적인 실행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듣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듣는다고 해서 그 들은 것을 실행하는 사람도 얼마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실행과 달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실행할 때에는 ‘힘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들과 달리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의지적 동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쇼핑을 하거나 돈을 벌거나 다른 여러가지 일들은 일 그 자체는 힘들 수 있어도 그 가장 깊은 곳에 내가 원하는 것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은 비록 외적으로는 힘들어도 내적으로는 힘들지 않은 셈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일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외적으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 역으로 내적으로는 힘든 일이 되는 것이지요.
‘차라리 날더러 백두산을 오르라 하면 오르겠다. 하지만 저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식의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두산을 오르는 것은 몸만 지치면 되는 일이지만 누군가를 용서하는 데에는 나의 의지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 백두산을 오르는 것보다 힘이 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분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가족이 아닌 이들은 종으로 머무를 뿐이고 일이 끝나면 집에서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가족이 되어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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