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루카 16,10)
사람이 작정을 하고 나서면 한 두어시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요. 그러나 자신이 아닌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나중에는 정체가 드러나고야 말지요.
회사에 새로운 사람이 왔는데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친절한 척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인내는 바닥이 나고 사소한 일에 흥분을 하고 나면 자신이 형성한 그 헛된 평판은 사라지고 맙니다.
성실성이라는 것은 내적 가치입니다.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 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신앙 안에서 성실성, 즉 하느님에게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쌓기가 더욱 힘든 가치이지요.
우리의 신앙은 커다란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20대 때에 한창 성경 연수 프로그램이 활성화 된 적이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하곤 했지요. 하지만 신앙은 그런 한때의 프로그램이나 감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오히려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조금씩 쌓여 가야 했던 것이지요. 수많은 청년들이 그 프로그램을 거쳤지만 참된 신앙은 그런 ‘연수’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일들에 열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작은 일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장차 큰 일들을 대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작은 일은 소홀히 하면서 큰 일은 잘 해나가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니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을 철저하게 지키자는 것일까요? 한 푼도 낭비하지 말고 재물 목록을 만들고 철저하게 감시하자는 것일까요?
천만에요. 관점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집사의 비유를 통해서 ‘돈’에 집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돈을 다루면서도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극히 세속적인 일 안에서도 사랑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성실성을 말하는 것이지 재물의 성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재물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사라지는 것이고 없다가도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찌나 ‘소유’한 것에 사로잡혀 있는지 가장 거룩한 복음 말씀 안에서도 우리의 본전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어쩌면 그 자체로 하느님께로 향한 우리의 성실성이 형편없다는 것을 반증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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