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코헬 11,9)
코헬렛의 저자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독려합니다. 흔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뭐든지 금욕하고 절제하고 삼가하기만 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누릴 만한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시니 좋게끔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을 축복하시지요. 다만 우리는 당신에게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과연 하느님의 뜻에 벗어나는 활동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성당에 가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고 술집에 가면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일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쉽게 빠지기 쉬운 율법의 함정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행위를 구분해 버리고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그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은 마음껏 누리기도 하고 또 반대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제쳐두고 율법적으로 해야 할 것만 같은 일만 신경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미사를 가는 것은 좋은 일인가요? 통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 표현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아니 신부님, 어떻게 신부님이 미사 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하지만 사실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느님에 대한 아무런 애정도 관심도 사랑도 없이 그저 다른 이들 앞에서 짐짓 의로운 체하기 위해서 미사를 나간다면 그 미사는 그에게 그 어떤 영적 가치도 지니지 못합니다. 아니 도리어 그의 세속적인 마음 때문에 스스로에게 장차 심판과 책벌의 원인이 되기도 하겠지요.
사제는 미사 중에 성체를 모시기 전 이런 기도문을 홀로 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이
제게 심판과 책벌이 되지 않게 하시고
제 영혼과 육신을
자비로이 낫게 하시며 지켜주소서.”
이처럼 성체를 모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마땅히 영혼과 육신의 치유와 보호가 되어야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옳지 못한 마음으로 받아모시게 되면 심판과 책벌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정반대의 예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한 사제가 본당 공동체의 한 청년들이 너무나도 자주 한 주점에 출입해서 문란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청년들을 선도하기 위해서 그 주점을 방문해서 청년들을 다시 공동체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제의 주점 방문은 그 자체로 사제에게 수치가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그 사제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서 그곳에 가서 청년들을 다시 하느님께로 이끄는 진정한 선교를 한 것이지요. (물론 그 핑계로 주점에 가서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이처럼 외적인 행위의 형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것을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행위가 거룩해집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을 잊으면 아무리 거룩해 보이는 행위를 해도 그것은 위선이고 가식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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