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6)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그를 향해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경우가 있지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 아니라 거짓된 반응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앞에 있는 것이 기쁨과 사랑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위에 짓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다가서면서 그와의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 그의 권위를 먼저 느낀다면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가면’을 쓰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 권위는 아무리 조심히 다룬다고 해도 결국 나에게 억압을 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권위가 아니면 다른 모든 권위들은 ‘교만’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다른 이들을 ‘통제’하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권위는 작용을 합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 누가 가장 으뜸인가를 두고 언쟁을 하곤 했으니까요. 그들은 다른 이들 높은 자리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상대의 권위를 느낀 사람은 그 앞에서 함부로 나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하지도 않습니다. 세속적 권위를 지닌 이는 솔직한 의견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지닌 이가 진정으로 솔직함을 바란다면 그는 그 권위 속에서도 겸손하고 선한 모습을 지닐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권위를 지닌 사람 앞에서 다른 이들은 그를 좋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게 말하던 이들은 그의 뒤에서 그를 욕하곤 하지요. 그것이 현실입니다. 권위를 지닌 사람 앞에서 대놓고 그를 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비난은 권위를 지닌 이가 자리에 없을 때에 이루어지지요.
우리는 진실한 권위를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참된 권위는 오직 진리와 선과 사랑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권위는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며 겸손합니다.
- 나 △△△ 출신이야.
- 내가 왕년에 △△△ 했지.
- 나 △△단체 △△기야.
이런 식의 표현을 하는 이들은 이미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권위를 내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입니다. 참된 권위는 그에게 덮씌워진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의사라면 그는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치유해야 하고, 누군가 선생이라면 그는 촌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사제라면 그는 호화로운 식사를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아야 하며, 누군가 수도자라면 그는 남들이 하는 일에서 벗어나 한가롭고 안락하게 지내는 게 아니라 자신을 태워 세상에 빛을 밝히는 봉헌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두셨습니다. 헌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우리를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만 주변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거짓 예언자들이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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