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하바 2,3-4)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고야 맙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신 분이시고 성실하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에 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책을 마련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억울해 하지요. 올바른 일이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악인들은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를 모르실 거라 생각합니까? 물론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당장에 당신의 일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하느님은 ‘자비’를 지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훈육’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개념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인들에게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만일 악인들이 악을 저지르는 족족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면 아마 지상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얼마 없을 것입니다. 악인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회개는 거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의인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일련의 노력은 의인들에게 ‘훈육’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그 능력을 습득할 수 있게 되듯이 의인들은 악인들을 선으로 초대하는 일을 하면서 그들 내면에 사랑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심하다’ 싶은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심해 보았자 당신의 외아들만큼 심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이었던 그분이 사람들의 시기와 증오로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분이 우리 앞에 길로 제시되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분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순수한 사랑도 아니며 오류가 많은 이들이니까요.
우리가 겪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작은 기쁨들을 누리고 또 시련이 다가올 때에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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