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11,49)
선한 이들은 때로 자신들의 오류에 대해서 다른 누군가가 하는 충고를 들으면 그 충고에 감사해하고 스스로의 오류를 바꾸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악한 이들은 충고 자체를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을 하고 복수를 하고자 합니다.
예언자와 사도들(물론 하느님의 진정한 예언자와 사도들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지요.)은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들입니다. 사명을 지닌 이들이지요. 그들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헌데 그 말씀은 선한 이들에게만 전해지라는 것이 아니었지요. 아니,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더욱 전파되어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난 이들, 죄악에 빠져 있는 이들을 위해서 전해져야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이제는 상황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복수’를 할 수도 없습니다. 애시당초 그런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위해서 해코지를 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들이었지요.
그들은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쳤고 때로는 충고를 때로는 훈계를 때로는 조언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는 이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오류를 바라보고 고치기는 커녕 그러한 것들을 지적하는 그들에 대해서 분노했고 그들의 입을 막으려 했고 심지어는 박해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곱상하게 차려입고 깔끔한 교리실에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둠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 선포는 수고와 피로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낭만적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체조배를 하면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스스로를 두둔하는 식의 신앙에 잠겨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곧 빛을 비추는 것이고 선교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이 없으면 우리가 믿는 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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