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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하려는 이들


우리가 하느님을 잃으면 거짓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은 파괴적인 것이 됩니다.

세상에는 ‘인본주의’를 표방한 것들이 많습니다. 휴머니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그것은 인간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이는 일들을 합니다. 소위 잃어버린 권리를 찾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인본주의는 그 가장 밑바탕에 ‘무엇이 선이고 사랑이고 진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 길을 잃고 맙니다. 한 부류의 집단을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집단을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은 이데올로기, 즉 하나의 이념으로 남게 되고 자신이 믿고 싶은 그 이념을 위해서 다른 이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이유이고 또 위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과 사랑과 진리에 기반한 그리스도인, 즉 하느님을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살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지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고 하느님은 파괴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살리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가톨릭’을 표방한 사람들이 파괴하고 부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에 기반한 것인지 알고 있지요. 그들은 하느님을 이용해서 다른 이를 향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부수고 무너뜨리려 하지만 그 반대로 세우는 것이 없습니다. 세우는 일은 인내를 요구하고 고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반면 파괴하고 부수는 것은 금방입니다. 그들은 좋은 것을 무너뜨리고 그 재료로 아주 초라한 자신의 탑을 세우려고 합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아웅다웅 살아 왔습니다. 한 부류가 득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를 노리던 다른 부류가 득세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또다시 기득권 세력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이들이 그 자리를 노리게 되지요. 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순환의 과정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그 굴레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건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추스리고 보듬고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일을 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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