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2티모 4,14-15)
바오로 사도에게 해를 입힌 이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바오로 사도는 그가 한 행동을 서술합니다. 그는 우리의 말, 즉 ‘사도들의 말’에 몹시 반대를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요? 사도들은 복음, 즉 기쁜 소식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그리고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주님의 뜻에 따라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라 나서서 결국 영원한 영광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에 반대했고 또 바오로 사도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알렉산드로스에게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선포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그 길을 따라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이는 알렉산드로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이 현세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벌어들인 것은 우리가 써야 하고, 우리가 잃은 것도 채워야 하지요. 바로 이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영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이 반드시 그 결과를 드러낸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들에게 일찍 맞이하는 죽음은 재앙일 뿐이며 현세의 고통은 피하기만 해야 할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현세를 사랑하고 또 현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의 삶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극단적이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내어서 따지고 들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다른 그 누구보다도 현재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 충실함을 ‘영원’을 바탕으로 할 뿐이지요.
내 손에 쥔 사탕만을 보면 절대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 안에서 끊임없이 사탕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자신의 삶을 봉헌해서 하느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영원 안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헌데 사제나 수도자가 노후를 걱정하고 마지막에 먹고 살 걱정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 걱정 자체로 영원에서 멀어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저마다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들이 득세한다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선인들이 억압 당한다고 슬퍼할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제 때에 당신의 할 일을 하실 것이니까요.
알렉산드로스는 바오로 사도에게 해를 많이 입힐 정도로 반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 입은 해를 하느님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다만 티모테오에게 그를 조심할 것을 경고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위험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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