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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2티모 4,2)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무조건 좋다고 들을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정반대의 일까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좋은 말은 모두 제쳐두고 당신의 성량, 발음, 문장구조, 배경 혹은 사상을 비판하면서 나설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지루해 하기도 할 것입니다. 술집에서는 절대로 지루해 하지 않을 사람들이지만 말씀 앞에서는 지루해 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공부방에 데려다 놓으면 잠이 오는 법이니까요.

행여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게 된다면 당신의 일은 성공한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에 파고 들어간 그 말씀은 씨앗이 되어 자라날 테니까요. 우리는 씨를 심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향한 무한한 신뢰 안에 씨앗을 심으면 됩니다.

사실 복음을 실제로 전하려고 노력해 본 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정신을 팔고 곧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말지요. 그리고 그러한 이들 중에는 아예 처음부터 말씀을 들을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하기 위해서 미사에 온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마다 노리는 것이 존재합니다. 고3 수험생을 둔 엄마는 자녀의 대학 합격이라는 세속적 바램으로 나올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성당 공동체 안에서 맺고 있는 인맥관계 때문에 나올 것이며, 다른 이들은 연애질을 하러, 또 누구는 취미활동 삼아 성당에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 가운데에서 말씀에 귀를 여는 이들은 신앙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고 아닌 이들은 때가 되면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로서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그 어떤 중요해 보이는 일이라도 군더더기일 뿐입니다. 성당을 짓고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짓는 그 모든 일은 복음 선포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면 복음은 건물이 없어도, 학교가 없어도, 병원이 없어도 선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해꾼들이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중요하다고 하고 엉뚱한 곳에 마음을 쏟도록 진을 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자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본질을 회복하는 순간은 ‘기도’하는 순간입니다. 기도가 없는 복음 선포자는 결국 헛바람이 들어가게 되고 엉뚱한 길로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헛되이 일하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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