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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지우고 손가락도 까딱 않는 이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6)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그것은 외적인 요소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보상만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힘든 일에 도전하곤 합니다. 사실 한국의 고3 수험생들이 죽자고 공부에 파고드는 이유는 ‘대학’이라는 것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외적인 프로젝트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내적인 요소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본인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본인의 의지에 반대되는 일’입니다.

회사에서 정말 고된 일을 무리없이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집에 돌아와 아내를 위해서 설거지 한 번 하는 것이 죽도록 힘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사에서 이행하는 과제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있는 ‘의지’와 부합하는 일이지만 집에서 아내를 돕기 위해 실천하는 설거지는 자신의 의지와 정반대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런 내면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활동 가운데 가장 으뜸이 바로 복음화에 종사하는 이들의 활동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도록’ 가르치고 자신을 추구하는 이기성에서 벗어나서 영원하신 분에게로, 또 그분을 통해서 이웃들에게로 사랑을 확장하라고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쉬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국에 나가서 성서학 박사를 따고 온 사람이면 그 권위 만으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제자들의 무리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화는 단순한 성경 지식의 전파와는 다른 것입니다. 복음화는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로는 말을 듣지만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되새겨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씨는 뿌려지지만 그것을 받는 이들의 마음이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서 다른 나머지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헌데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관해서 일침을 놓으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힘겨운 일을 시키는 그들 본인들이 정작 아무런 변화를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소중한 가르침들을 다루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임무를 지녔지만 그것을 올바로 전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본인들 스스로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말씀이라는 것은 ‘가르침’으로 전해지는 것이기보다는 ‘실천’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말씀이 사랑이면 사랑을 실천해야 그 사랑이 전해지는 것이고, 우리가 가르치는 말씀이 인내라면 인내를 실천하는 사람이 그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이론으로 정립하고 책에 담아서 그 지식을 가르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지식적인 선에서 받아들이고 마는 셈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아는 바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직분을 받은 이들은 보다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제이고 수도자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마땅히 겪어야 하는 삶의 굴레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지는 만큼 보다 더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성화의 임무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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