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의 갈라티아서 말씀을 바탕으로 적은 글에 한 분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요지는 ‘만취, 흥청대는 술판’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뜻인가 아니면 다른 숨은 뜻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지요.
당연히 문자 그대로입니다. 물론 굳이 영적으로 해석하면 그에 상응하는 내용들을 분별해 낼 수 있겠지만 만취와 흥청대는 술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한국 교회는 술에 대해서 관대한 편입니다. 특히나 신부님들부터 술을 마시는 데에 주도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술판 때문에 가정에서 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술이라는 것은 절제와 더불어 즐기지 않으면 그 즉시 독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절제의 기준이라는 것이 서로 남다르다는 데에 문제가 있지요.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지 않으면 절제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합당한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술은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것이고 중독되어 가는 것입니다. 과한 술은 언제나 몸에 독소를 남기고 서서히 사람을 망가뜨리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지를 점점 약하게 만들어서 결국 술의 노예가 되게 하지요.
필름이 끊기기 직전까지 마시는 것은 절제를 하는 게 아니라 간을 보는 것입니다. 내 몸의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간의 해독능력을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술은 절대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까지 마셔서는 안되며, 또한 꾸준히 마셔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 안에서 술자리 문화는 적지 않은 경우에 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마시고 또 많이 마십니다. 아예 시작부터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랑거리나 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무슨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술을 못한다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도 억지로 술을 먹이고 고주망태가 되는 모습을 즐기는 가학성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삶이 고된 나머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것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변의 이런 저런 빡빡한 상황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도피처로 알콜을 찾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닙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리고 지금의 한국 교회는 술에 관해서 어느 정도 제동장치가 필요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절대로 미덕이 아니며, 절제와 더불어 마시는 것이 필요하며 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모쪼록 우리 공동체가 만취와 흥청대는 술판에 휘청거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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