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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자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8)

“아니, 신부님. 그럼 왜 하느님은 지금 세상의 온갖 불의를 보고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니요, 잘못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지금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하기를 바라시는 분께서 마냥 쉬고 계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당신의 일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뿐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하느님은 당신의 지혜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모든 기호를 다 맞추려고 끙끙대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의 종일 뿐입니다.

그럼 도대체 하느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협소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이 전혀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 예수님이,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흠도 티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박혀 돌아가셔야 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정말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편협한 생각에 하느님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의로운 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것 같아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이 십자가 상에서 신음하는 것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분 같아 보이는 것이지요.

이는 우리의 생각으로 재단된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이리 저리 궁리해서 만들어 낸 하느님일 뿐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에게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님을 미워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지요. 부모님은 자신을 위해서 하루종일 나가서 직장에서 고생을 하고 집안에서 살림을 하는데 고작 장난감 하나 사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 부모님에게 해서는 안 될 소리를 하는 못되먹은 자녀와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세상의 불의를 모르실거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하느님을 그렇게나 얕잡아 보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 상응하는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만 그것을 ‘영원’ 속에서 이루십니다. 우리의 짧은 생에 동안 모든 것을 뒤바꾸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 안에서 그 일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현재 속에서 하느님은 ‘자비’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랄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가라지가 뽑혀서 불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라지를 뽑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때가 찰 때 까지 하느님은 밀과 가라지를 함께 두실 것입니다. 그렇게 밀은 더욱 튼튼해지고 가라지도 혹시 밀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의 지혜를 믿지 못합니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하느님을 판단해서 속상해합니다. 하느님의 판결은 이미 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을 좋아하시고 악을 내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즉각적인 결과로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지고 말 일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하실테니 집안에서 묵주알이나 굴리고 있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사제는 사제로서 충실히 할 몫을 다하고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할 일을, 그리고 신자분들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몫을 다하면 됩니다. 물론 그 일이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이 갈릴 것입니다. 누군가는 발로 뛰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올바로 분별해야 한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이 어느 방향으로 서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마리아와 마르타는 모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마르타가 마리아를 보고 답답해 하는 순간 주님은 마리아에게 가서 일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마르타에게 사랑으로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까요? 그분의 섭리하심을 믿고 있을까요? 과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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