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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서 16장 (죄, 의로움, 심판)


요한 복음서 16장
죄, 의로움, 심판

죄 = 예수님을 믿지 않음
의로움 =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함
심판 =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음

우리가 통상적으로 하는 '죄'에 대한 생각은 계명의 어김입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고 그걸 어기면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고?
그럼 우리 선조들은 다 죄인인가?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특정 종교의 지도자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초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과 행적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과 행적을 곡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사실 '껍데기'를 숭배하고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 이라면 설령 그리스도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교회에 몸담고 교회의 모든 규정을 다 지킨다 하더라도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면,
이 사람은 '죄'를 짓고 있는 셈입니다.

죄는 규율의 준수가 아니라,
예수님이 보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로움'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의로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의 의로움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의로움을 늘상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당한 건 갚아야 하고, 얻은 건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로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받게 되실 것이고,
우리 눈에서 사라져서 영원히 향유하게 되실 무엇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눈에 보이는 걸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주고 받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로움은 영원의 차원을 얻는 것입니다.
'영원'으로 우리는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을 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 마음을 어쩔까요?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은 작은 꼬마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사탕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작은 차원의 짠돌이 의로움이 아니라
영원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영원의 차원으로 통크게 선물해 주시는
진정한 의로움이라는 말입니다.
이 정도에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심판'입니다.
이 세상 우두머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 세상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고,
그를 추종하는 모든 이들은 자동으로 그 심판의 대열에 들게 됩니다.
이것이 '심판'의 본질입니다.
심판은 우리가 행한 무언가에 대한 결산으로 다가올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순간에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무언가,
이 세상 우두머리의 소유의 무언가를 택하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두 종류의 종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타임 캡슐에 집어넣을 종이이고,
다른 하나는 곧 불싸질러버릴 낙서장입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의 글을 적는다면 어디에 적어야 할까요?
마땅히 영원히 보관될 종이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돈, 명예, 권력, 건강, 미모'등등에 집착함으로써
불싸질러질 낙서장에 나의 영혼의 연필을 닳아가며 글을 적고 있는 셈입니다.
그 글을 적는 순간 우리는 이미 불싸질러질 운명에 동참하는 셈입니다.
미움도 증오도, 시기심도, 탐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런 행위에 가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심판의 길로 들어서는 셈입니다.

반대의 글을 적으십시오.
'희망, 사랑, 인내, 겸손, 온유, 친절, 기쁨'등등의 글을 영원의 종이에 적으십시오.
우리의 심판은 이미 이루어 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미 우리들은 매일매일 그 심판을 우리 스스로 선택하여 이루고 있습니다.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요한 복음 16장에 숨겨진 이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 삶 안에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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