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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권위


참된 권위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 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요한 복음 18장의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권위'라는 것에 정면승부를 던집니다.
진정한 권위는 '진리'에 바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느님의 진정한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위는 이 바탕 위에 서 있어야 하고
여기에서 벗어난 권위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날 때마다
늘 뜻있는 자들의 '저항'이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이 '저항' 역시도 '진리'에 바탕해야 합니다.
그저 자리바꿈에 그칠 뿐인 저항은 진정한 의미의 저항이 아닙니다.

"대사제께 그 따위로 대답하느냐?"
특히나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참으로 많이 들을 소리일 수 있습니다.
"어디 어르신 앞에..."
"어디 선생님 앞에..."
"어디 XX도지사님 앞에..."
"어디 신부님 앞에..."

대단한 위계로 나뉘어져 그의 행실에 상관없이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섬겨야 하는 사회.
유교정신과 군대문화가 합쳐져서 어딜 가든지 '조직'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사회.
한국 사람의 마음에 은연중에 '문화'로 깃들어 있게 마련이고,
이 글을 쓰는 저 역시도 저보다 젊은 사람이나,
암묵적인 위계 안에서 낮은 이가 이런 저런 충고를 해 오면,
"어디 내 앞에서..."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이 불쑥 불쑥 솟아나오곤 합니다.

진리 안에서 권위를 찾았으면 합니다.
그게 안된다면 '겸손'이라는 덕목이라도 갖췄으면 합니다.
다른 누구에게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바로 저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의 한 장면에서 '권위'를 정화시키십니다.
참된 예수님의 권위가 많은 이들에게 깃들었으면 합니다.
진리 안에 바탕한 권위, 사랑 위에 굳건히 서 있는 권위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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