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18장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다. 최근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복음이 등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군중들은 증오에 가득 차 있어서 '진리'고 나발이고가 없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증오의 대상을 제거하는 것 뿐이다.
세상 안에서도 이런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증오에 가득차서 다른 이들을 심판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진리'란 이미 물건너간지 오래다. 지금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선 무엇을 바라는지는 전혀 알 바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처에 둘러싸여 있고 그 상처를 일으킨 원인과 더불어 그 사람을 증오할 뿐이다.
한 영혼은 악할 수도 선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미흡하고 나약한 동안에 우리는 많은 잘못과 오류를 범하게 되고, 훗날 시야가 넓어지고 하느님의 빛의 조명을 받으면서 이런 것들을 뉘우치게 마련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거쳐야 하는 과정일 뿐, 어느 누가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피고발자와 심판자가 나뉘어지니, 피고발자는 자신의 과오를 가득 담고 있는 사람이고 심판자는 자신이 짐짓 죄가 없는 듯이 타인을 심판하는 이들이다. 요한 복음 18장이 상황이 그러하나, 이 순간이 더 최악인 것은 예수님은 심지어 털끝만치도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순간 만큼은 모든 심판의 자리에 놓여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죄에 죄를 더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문제해결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참 어리석고도 어처구니 없는 방법, 즉 모든 걸 감싸 안고는 자신이 죽어버리는 방법이다. 소위 의식이 있다는 그리스도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이다. 자신이 열심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받은대로 갚음'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않다. 예수님의 이 방식을 현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남의 잘못을 마치 자신이 저지른 듯 감싸안고 자신이 그 벌을 받는 방식은 지금의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오직 '진실된 그리스도인들'만이 쓰는 방식이다. 이들은 더이상 악을 저지르지 못할 뿐 아니라, 남이 저지른 악도 감싸안는 사랑을 지닌 이들, 즉 쓰레기를 더 이상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버린 쓰레기도 치우는 사람이다. 여기서 쓰레기는 영적인 차원의 쓰레기, 즉 세상에 만연한 '악'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라도 이런 사람이 있으면 결국 세상은 변화된다. 이 전혀 새로운 방식에 세상은 놀라 자빠지게 된다. 그들은 심지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자신을 보호할 줄은 알아야지요?'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는 마치 유다가 '지금 뭐하는 거요? 그 향유를 팔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터인데!'라고 투덜거린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그저 고상하게 주일미사나 나가고 성사생활 어기지 않고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쓰레기를 안 버리는 데 만족하신 분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깨끗하게 만들 작정을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런 각오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청소도구로 세상에 만연한 악들을 녹여 나가야 한다.
때로 사람들의 증오를 만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증오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결코 구축하는 법이 없다. 한 나라와 한 나라가 힘으로 서로 싸워서 누군가가 이기면, 뭔가 새롭게 세워질 것 같은 느낌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진정한 평화는 '참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18장을 천천히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주목해보자.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고 계시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