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
죽음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영원한 숙제입니다.
일단 어떻게든 산다면, 이 목숨을 부지한다면
세상 안에서 문제를 해소하던지 회피하던지 할 터인데,
어느 날인가 인간은 마치 이 세상에서 추구해오던 모든 것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가꾸어오던 몸도 생명이 끊어지고나면 썩기 시작하고,
은행에 가득가득 채워두었던 돈도 세상 사람들이 나눠 먹고,
자아 완성을 한답시고 애쓰던 직장도 의미를 상실하고,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 나를 위해 어찌 손을 써 줄 수는 없습니다.
이 극도의 허무와 상실...
이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죽게 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허무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하고,
오히려 시작이라 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죽음 이후에 본격적인 삶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인간의 근본 질문에 봉착한 사람은 '선택'이라는 걸 해야 합니다.
시쳇말로 한 번 속아 보던가,
아니면 그 근처도 다가가지 않고 내 마지막 남은 육신의 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찌질하게도 양다리를 걸친 사람들인데...
여전히 이 생을 누리기를 원하면서도 한쪽 다리를 영원에 걸치려는 이들입니다.
또 전혀 딴판으로 영원을 '이용해 먹는 이들'이 있으니
성경에서
"하늘 나라는 힘을 쓰는 자들에 의해 수탈당한다"고 표현되는 대목입니다.
하늘나라를 팔아서 한 몫 단단히 보려는 이들,
하늘나라로 현세의 생을 유지해 보려는 이들입니다.
이든 저든 한 사람은 떠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이미 영으로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말이죠.
육의 쾌락은 한순간이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행복'이지 육의 쾌락이 아니며,
이 행복이라는 것은 눈에 전혀 보이지 않고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어도 벌어도 행복은 커녕 욕심이 더 쌓이고 가질수록 문제는 더 커집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했는데,
올라갈수록 적만 늘어나고 사람들은 내 앞에선 알랑방귀를 뀌다가 물러나서는 내 험담을 하고 있습니다.
명예를 잔뜩 쌓아서 유명해지면 좀 나아지려나 했더니...
그건 진정한 명예가 아니고 사람들의 반짝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었고,
내가 10년을 노력한 것을 불과 하루 만에 모두 잃어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간절히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나마 눈이 좀 뜨인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 '행복'을 찾기 위해 나섭니다.
열심히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을 누려볼까 하는데...
이 사람들이안 존재가 얼마나 변덕쟁이들인지요.
어느 날에는 날 사랑했다고 하다가 또 다른 날에는 날 죽일듯이 덤빕니다.
나 스스로에게도 느끼지만 인간은 온전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 안에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저는 '하느님'이라는 분 앞에 돌아옵니다.
영원을 간직하신 그분,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그분,
사랑의 근원이신 그분께로...
저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사랑을 내어 드리고,
그분은 저에게 '영원'을 선물하십니다.
그리고 저를 '죽음'에로 초대해 주십니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죽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길을 찾았던 그 죽음에로 저를 부르십니다.
저는 당신의 약속이 헛되지 않을 줄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죽음은 저의 영원이 될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나의 현세의 여러가지 소유물들 중에서 무엇을 죽여야 할런지요.
그것은 나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노력'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명예'와 '권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먹잇감을 너무나 좋아해서
언제든지 나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꺼이 봉헌하렵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