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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과 함께 걸어가는 '가정' [1]


마르코 복음과 함께 걸어가는 '가정'

가정 위원회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점점 헤이해져가는 가정 위원회의 구성원들의 마음을 새로이 다잡기 위해서 계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주 금요일마다 양성과정을 마련해 보자고 하였고, 차일 피일 미루던 중에 오늘 아침에 문득 연락이 와서는 당장 오늘 저녁부터 하겠다고 합니다. 조금은 갑작스런 실행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이 역시 하느님께서 마련하긴 기회라고 생각하고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복음 말씀 외에는 달리 아는 것이 없기에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은 마르코 복음으로 가정 위원회의 양성과정을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1장
길 다듬기(첫 시작점)

어느 길이든지 첫 시작이 있게 마련이고, 그 시작에 앞서 준비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마찬가지의 준비과정이 필요했고, 가정에 대해서 배워 나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가장 첫 시작점에 우리는 '길을 고르게 하기'라는 작업을 만나게 됩니다. 길을 고르게 하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깊이 파인 곳을 메꾸고, 다른 하나는 우뚝 솟아있는 부분을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오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안의 이 두 가지 부분, 낮춰진 부분을 들어높이고, 높아진 부분을 깎아내리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낮추인 마음과 높아진 마음
우리는 '약점'이 있고 '죄'를 짓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묵직한 마음이 바로 낮춰진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좋은 수단으로는 '고해성사'가 있습니다.
반대로 마치 우리가 죄가 없다는 듯이 생각하는 마음,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능력이 대단한 무엇인가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은 높아진 마음입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좋은 수단으로는 '단식, 기도, 자선'이 있습니다.

가정을 바로 세우려는 이들은 이 작업을 선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 안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수많은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가정 전문가를 데려다가 이런 저런 실제적인 지도와 방침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심이 무너져 있다면 그 어떤 최고의 방법을 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가 서울에 가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는 헬기나 제트기를 선택하고도 정작 방향은 제주도를 향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길을 고르도록 합시다. 낮춰진 마음을 들어높이고 교만한 마음을 낮추도록 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 날을 기다렸으면 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주님(물과 성령)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옛 포도주의 대표주자입니다. 이 땅위의 사람 중에는 그보다 더 열심한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예수님 앞에서는 신발끈을 묶을 자격도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의 간극을 세례자 요한은 '물'과 '성령'으로 표현합니다.

물은 우리의 외면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샤워를 깨끗하게 한 사람은 몸이 깨끗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차원일 뿐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맑게 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씻어내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물은 어떻게든 외적인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아이가 씻기를 거부해도 엄마가 씻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령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이는 앞서의 단락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마음길을 잘 열어두면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맑게 가꾸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어두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외적인 것에 치중하여 가정을 꾸려 나가려고 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이런 저런 온갖 좋은 것들을 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가정 안에도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가정을 올바로 이끄려는 사람은 가정 안에 '성령'의 능력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늘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설령 빵 한 조각을 온 가족이 나누어 먹더라도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외적인 것만을 가득 채운 채로 내면이 공허한 집안은 매일 진수성찬을 먹어도 서로 욕심내고 미워하기 일쑤입니다.

물로 상징되는 외면도 소중하지만, 성령으로 상징되는 내면을 채우십시오. 모든 것이 바로서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보내지는 광야

많은 이들이 가정 내에 축복을 바랍니다. 하지만 '축복'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들이란 '많은 돈, 높은 지위, 좋은 직장'등등입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의 '축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가지 좋은 예가 바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었고, 예수님은 그 광야에서 굶주림을 체험하시고 사탄에게 유혹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이라면 하느님의 영인데 왜 예수님을 그런 고생스러운 곳으로 보내어 고통받게 하실까요? 하느님께서는 절대 쓸모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시련과 유혹의 시간들이 예수님에게는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물고기를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언제나 물고기를 잡아 자신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축복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가정에 주어지는 축복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축복을 받았다고 할 때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가정 내의 모든 문제가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가족이 신앙 안에서 하나되어 똘똘 뭉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가정 내에 이러한 성령의 축복이 가득 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부르심과 응답(진정한 사랑의 권위)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우리의 가정 역시도 같은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삶에로 들어높여지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지요. 하지만 부르심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요?

아버지가 아들을 부릅니다. '누구누구야~'라고 불렀을 때에 그 자녀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응답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힘과 권위를 두려워해서 피치 못하게 응답을 합니다. 이는 사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에 더 가깝습니다. 이런 이들은 주인의 권능이 사라지면 언제라도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 오를 준비가 된 이들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의 응답입니다. 이 자녀는 아버지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아버지가 부르면 기꺼이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하나되어 있어서 아버지의 뜻이 곳 아들의 뜻이 됩니다.

나아가 응답의 차원에서 우리는 보다 나은 것을 고르고 선택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을 때에 내가 이미 더 좋은 사람과 마주하고 있고 그 만남을 즐긴다면 굳이 나를 불러대는 귀찮은 찰거머리들 같은 존재들을 따라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교황님과 만나고 있는데 내 술친구가 부른다고 해서 교황님을 내팽개치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응답한 것은 예수님의 본래의 가치, 그분의 크신 사랑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고 제자들이 응답하여 기꺼이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하는 것은 다름아닌 이 '사랑'의 부르심과 응답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는 무척이나 간단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느 누구에 대한 진솔한 사랑 없이 어떻게 어부들이 그물을 버리고 그 대상을 따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이 사랑의 부르심을 이해하고 그 길을 따라 나서야 하며, 여러분의 자녀들도 그렇게 초대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으로 부르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부모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자녀들도 부모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유대 속에서 모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거짓 거룩함

회당 안에서 만난 한 악령들린 이가 예수님을 보고 외칩니다. "우리에게서 뭘 원하십니까? 저는 당신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라는 걸 압니다!" 이것이 나타내는 바는 무엇일까요? 어둠의 세력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나름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지요. 선함과 진리와 거룩함을 잘 이해하지만 절대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고, 오히려 반대의 것을 실행하는 자들입니다.

수많은 가정이 껍데기 신앙을 유지합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가 규정하는 첫영성체, 견진, 교회혼등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껍데기에 머무르다가는 그야말로 회당 안에 버젓이 있는 악령들린 가정이 되고 맙니다. 성당 안에서만 입술 신자가 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술에 취하고 폭력을 쓰고 서로서로 증오하는 악마의 소굴을 만들어 버리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귀로 들어서 지식을 채우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가정들에게 부르짖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리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 가정 안의 어두움을 쫓아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기도를 싸우고 있는 당사자에게 고함을 지르지는 말고, 작은 분노가 생기거나 어두운 마음이 깃들기 시작하는 순간에 마음 속으로 나 자신에게 고함 지르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하여라! 내 마음에서 그리고 이 가정에서 나가라!!"


수많은 일과 한밤중의 기도

예수님은 수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서 하실 수 있는 일들, 구세주로서 하실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에도 절대로 잊지 않으신 것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과의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인 '기도'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정 역시 저마다의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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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