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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두가지 방식

싫다는 걸 억지로 잡아당기면 끌려오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지니고 있으면 자연스레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부류의 것들은 서로 상충되게 마련입니다. 하나를 사랑하는 이는 다른 하나를 무시하게 마련입니다. 성경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몸으로 느껴지는 것, 즉 선교사는 돈이나 물질로 사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를 사랑합니다. 자신들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베푸는 선교사를 현지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곧 한계를 드러냅니다. 물질이 떨어지는 순간 이들의 사랑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를 일단 시작하면 계속해서 그 양을 늘려가야 합니다. 마치 마약을 시작하면 점점 익숙해져서 갈수록 주사량을 늘려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술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이런 식의 선교 방식은 반드시 ‘끝’을 드러내게 되고 그 끝은 비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전혀 복음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안에 탐욕만 가득하게 되지요.

영으로 느껴지는 것, 즉 말씀의 힘, 성령의 힘으로 사목하는 선교사는 다릅니다. 이 선교사는 초반에 많은 시련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당장 느껴지는 게 없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복음화를 계속해 나갈수록 그 안에 들어있는 ‘십자가’를 느끼게 됩니다. 봉사하기 싫은데 봉사의 자리에 나가야 하고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기 싫은데 그런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복음화의 자리이든지 첫 선구자는 무척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화의 과정은 싫어하지만 복음화의 결과물은 좋아합니다. 누구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에 살고 싶어하고 따스하게 서로를 맞이하는 공동체에 살고 싶어하니까요. 그래서 이 공동체는 계속해서 그 열매를 늘려가게 됩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얻게 되지요.

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을 잃을까 걱정해야 하지만, 후자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가게 됩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위대하리라는 표현은 바로 후자의 선교사, 복음을 바탕으로 하는 선교사의 일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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