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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1주 주일 강론(2007년 말)

안다고 생각하는 것...
범어성당에서의 일입니다. 한 고등학생 친구가 있었습니다. 인물도 좋고 성당 학생 밴드부에서 드럼도 치던 녀석이었습니다. 전날까지 생생한 표정으로 만나던 녀석이었는데 어느날 밤에 그 녀석 누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 동생이요... 많이... 아프거든요... 기도 좀 해 주세요..."
듣자하니 자전거를 타고 장난을 치다가 머리부터 떨어져 중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부랴부랴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지만 이미 의식은 불분명해 보였습니다.
포항 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한 아저씨가 실려왔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습니다. 주절주절 말도 하던 그 아저씨가 갑자기 왈칵 피를 토해 내더니 쇼크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모두들 당황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기를 써서 호흡은 살려 내었지만 이미 아저씨의 의식은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보호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의사에게 대들어도 보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습니다. 
언제 다가올 지 아는 것은 누구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쪽지 시험 날짜가 내일이라면 나는 오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수능이 언제인지 알기에 고등학생들은 고3때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생을 거쳐 준비해야 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이라는 시험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다가올는지 모르는 시험입니다. 세상 안의 시험은 잘못 치루더라도 그 부분만을 희생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시험은 잘못 준비했다가는 우리의 영원한 삶을 날려버리게 됩니다. 헌데 의외로 사람들은 천하태평입니다. 그다지 이 '죽음'이라는 영원의 시험 앞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들의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나에게 죽음이 언젠가는 찾아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자신이 맞이하기 싫으면 내칠 수 있는 것처럼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만 하면 죽음이 멀리 사라져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을 떠납니다.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아가다가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1주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첫 주간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합당하게 기다리고 있는지, 그분이 오셨을 때에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반성하고 기다림에 합당한 자세로 살아갈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준비하고 있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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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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