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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나이의 진행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물론 요즘같은 세태에는 육체적 나이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얼굴의 잔주름을 없애고 잡티를 없애고, 처지는 살들을 다시 메꾸어보려고 성형까지 하는 상태이니 그런 이들의 마음가짐은 짐작해 볼 만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나이가 들어간다는 표현보다는 ‘성숙해진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 같습니다.

성숙해짐에 따라서 우리가 어리고 젊었을 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이 우리를 두고 드러내 보였던 여러가지 모습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 마냥 위대해 보이기만 했던 아버지의 처진 어깨를 알 수 있게 되고, 모든 정보의 총 집합소 같기만 했던 어머니의 히스테릭한 면도 눈에 드러나기 시작하며 과거 은사들의 보다 인간적인 면모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두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모두 같은 인간, 나약하고 부족함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 뿐이 아닙니다. 사람은 성숙해질 뿐 아니라 ‘지혜’가 자라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특별한 부분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찾는 이에게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인간은 지혜가 자라나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숨겨진 뜻을 알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하찮음에서 벗어나 거룩한 분의 의지를 받아들이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이 지혜를 통해서 사람은 신비적 차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는 나이를 따라서 절로 다가오는 게 아닙니다. 지혜는 의지를 봉헌하는 만큼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의지를 고스란히 간직하려고 드는 이는 지혜롭지 못한 자가 됩니다. 그의 외모는 어른이고 세상의 사정을 잘 아는 성숙함을 지닐 수는 있지만 결코 지혜로운 자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사랑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지혜로써 사랑을 얻는 것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때로 어린 순교자를 마주할 때에 우리는 의아해합니다. 저 조그만 것이 뭘 알아서 저랬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지혜로운’ 아이들이었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고작 24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처 30이 되어 세상 돌아가는 꼴도 잘 몰랐을 것인데 어떻게 성덕을 이룰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단순히 나이들어가는 것을 재산으로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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