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부가 드러나면 고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활동이 가시적인 것이면, 즉 영에 사로잡혀 그 행동이 완전히 변하고 이 사람이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것이 드러나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바로잡으면 되니까요.
문제는,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가려져 있을때입니다. 즉 속에 상처가 나서 썩어 들어가고 생명이 위험한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가 없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인 셈이지요.
예수님께서 만난 더러운 영에 걸린 이는 사실 하나의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실제 복음화의 대상은 그 지역 모든 주민들이었지요. 사람을 살리시는 주님을 두고 돼지떼가 죽은 게 아깝고 앞으로 더 많은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에게 떠나가 달라고 부탁한 그들의 영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더러운 영에 걸린 이를 고치고 난 후에 당신을 따라오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일대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 더러운 영에 걸린 이는 치유된 이후에 ‘선교사’가 되어 버린 셈이지요.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채로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이 더 많습니다. 차라리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면 치유받을 수 있을 것을 아무렇지 않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니 문제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험담하면서 괜찮다고 하니 그게 더 문제입니다. 차라리 더러운 영이 그를 밀어붙여 고함이라도 지르고 괴팍한 행동이라도 하면 도리어 그를 향한 진정한 치료가 이루어질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문제는,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가려져 있을때입니다. 즉 속에 상처가 나서 썩어 들어가고 생명이 위험한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가 없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인 셈이지요.
예수님께서 만난 더러운 영에 걸린 이는 사실 하나의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실제 복음화의 대상은 그 지역 모든 주민들이었지요. 사람을 살리시는 주님을 두고 돼지떼가 죽은 게 아깝고 앞으로 더 많은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에게 떠나가 달라고 부탁한 그들의 영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더러운 영에 걸린 이를 고치고 난 후에 당신을 따라오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일대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 더러운 영에 걸린 이는 치유된 이후에 ‘선교사’가 되어 버린 셈이지요.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채로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이 더 많습니다. 차라리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면 치유받을 수 있을 것을 아무렇지 않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니 문제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험담하면서 괜찮다고 하니 그게 더 문제입니다. 차라리 더러운 영이 그를 밀어붙여 고함이라도 지르고 괴팍한 행동이라도 하면 도리어 그를 향한 진정한 치료가 이루어질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