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마태 13,16)
구원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만진다는 표현은 굉장히 직접적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만질 수 있는 구원을 지니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직접 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신 분이 ‘인간’이 되어 실존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그 기회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끊임없이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당신을 남겨 두셨습니다. 바로 ‘성체’이지요. 우리는 성체를 통해서 그분을 보고 만지고 심지어는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만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구원을 만져서 구원을 얻은 이가 있는가 하면 구원을 보고 밀치면서 구원을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기피하고 중상하고 모략하는 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직접 겪으신 일들이지요. 하혈하는 여인, 중풍 병자, 나병 환자, 간음하는 여인... 그들은 모두 구원을 보고 마주하고 만지고 느끼면서 그분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소위 안다는 자들은 구원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여서 음모를 꾸미고 죽여 없애 버릴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만질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신앙인들입니다. 그 어떤 다른 종교에도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지닌 신앙을 온전히 함께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러하였듯이 단순히 그분을 보고 만지고 심지어는 먹는다고 뭔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향한 간절한 신앙,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올바로 체험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서 하품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사의 은총을 잔뜩 받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꽉 막힌 이들이 아니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지고 먹을 수도 있는 실제적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만진다는 표현은 굉장히 직접적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만질 수 있는 구원을 지니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직접 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신 분이 ‘인간’이 되어 실존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그 기회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끊임없이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당신을 남겨 두셨습니다. 바로 ‘성체’이지요. 우리는 성체를 통해서 그분을 보고 만지고 심지어는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만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구원을 만져서 구원을 얻은 이가 있는가 하면 구원을 보고 밀치면서 구원을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기피하고 중상하고 모략하는 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직접 겪으신 일들이지요. 하혈하는 여인, 중풍 병자, 나병 환자, 간음하는 여인... 그들은 모두 구원을 보고 마주하고 만지고 느끼면서 그분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소위 안다는 자들은 구원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여서 음모를 꾸미고 죽여 없애 버릴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만질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신앙인들입니다. 그 어떤 다른 종교에도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지닌 신앙을 온전히 함께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러하였듯이 단순히 그분을 보고 만지고 심지어는 먹는다고 뭔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향한 간절한 신앙,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올바로 체험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서 하품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사의 은총을 잔뜩 받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꽉 막힌 이들이 아니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지고 먹을 수도 있는 실제적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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