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마태 10,23)
예수님이 수난 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구원자셨기에 그런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리에서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박해를 피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 있지만 일부러 고통을 찾아다니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박해가 필요 이상의 것이고 우리의 능력 밖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 박해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핵심은 단순히 고통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한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고 도리어 빛의 말씀에 화를 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귀는 닫혀 있고 그들은 장님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이를 박해하지요.
복음을 들을 기회는 더 많은 이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자는 들을 귀가 있는 이들을 찾아 다녀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억지로 복음을 우겨 넣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들으려는 이들에게 선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분별력으로 이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 이전에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할 의욕이 있는가?’ 라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전할 마음 자체가 없으면 위의 모든 내용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는 이에게는 그 어떤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다만 세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고난을 당할 뿐이지요.
예수님이 수난 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구원자셨기에 그런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리에서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박해를 피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 있지만 일부러 고통을 찾아다니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박해가 필요 이상의 것이고 우리의 능력 밖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 박해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핵심은 단순히 고통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한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고 도리어 빛의 말씀에 화를 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귀는 닫혀 있고 그들은 장님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이를 박해하지요.
복음을 들을 기회는 더 많은 이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자는 들을 귀가 있는 이들을 찾아 다녀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억지로 복음을 우겨 넣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들으려는 이들에게 선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분별력으로 이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 이전에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할 의욕이 있는가?’ 라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전할 마음 자체가 없으면 위의 모든 내용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는 이에게는 그 어떤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다만 세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고난을 당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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