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50)
예수님의 아주 단순 명료한 ‘가족 정의’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랍니다. 다른 건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기준으로 잡고 스스로를 살피면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으신가요? 거기에는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 아래 형제 자매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만 살피면 됩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얼마나 쉽고 간단합니까?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묻지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냐?’고 묻습니다. 묻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그래도 묻습니다. 물어보니 대답해 주어야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묻는 사람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물을까요? 아는 것을 물어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몰랐으니 물어보던지 자신이 하는 것이 의심스러우니 물어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뭔가 열심히 하는데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고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정말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용서를 하라는데 이런 인간도 용서를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일은 너무 힘든 일인데 신부님이 나에게 시키는데 이걸 떠맡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주임 신부님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묻고 또 묻습니다. 헌데 ‘실행’하는 사람은 드물어 보입니다.
묻고 답을 듣고 또 묻고 또 답을 듣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실행하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여전히 같은 모습입니다. 용서하라 하니, ‘이래도 용서해야 하냐?’고 또다른 질문을 던질 뿐, 구체적으로 용서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실패하더라도 일을 한 번 맡아보라고 하니 ‘지금 내 상황이 이런데도 이 일을 반드시 맡아야 하느냐며?’고 또다른 질문을 던질 뿐, 한번 자신을 내어맡겨 볼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정말 힘든 케이스의 목자 앞에서 그래도 양심에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는 이상 순명해 보라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도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묻기만 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꺾는 실행을 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교지에 사람이 없다고 사제가 미사만 드려도 감지덕지라는데 섣불리 나서서 가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해도 저마다 제 자식은 성공하고 결혼해서 살아야 한다며 부둥켜 안고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색다른 삶의 길이 있다는데도 젊은이들은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성소의 길을 걷느냐고 함부로 나서지 않으려 합니다. 초대받은 이는 많지만 참여하는 이는 없는 셈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 모든 은총은 ‘실행하는 자들’의 몫이 됩니다. 나서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몫이 되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 훗날 주님과 함께 한지붕 아래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주 단순 명료한 ‘가족 정의’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랍니다. 다른 건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기준으로 잡고 스스로를 살피면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으신가요? 거기에는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 아래 형제 자매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만 살피면 됩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얼마나 쉽고 간단합니까?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묻지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냐?’고 묻습니다. 묻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그래도 묻습니다. 물어보니 대답해 주어야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묻는 사람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물을까요? 아는 것을 물어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몰랐으니 물어보던지 자신이 하는 것이 의심스러우니 물어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뭔가 열심히 하는데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고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정말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용서를 하라는데 이런 인간도 용서를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일은 너무 힘든 일인데 신부님이 나에게 시키는데 이걸 떠맡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주임 신부님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묻고 또 묻습니다. 헌데 ‘실행’하는 사람은 드물어 보입니다.
묻고 답을 듣고 또 묻고 또 답을 듣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실행하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여전히 같은 모습입니다. 용서하라 하니, ‘이래도 용서해야 하냐?’고 또다른 질문을 던질 뿐, 구체적으로 용서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실패하더라도 일을 한 번 맡아보라고 하니 ‘지금 내 상황이 이런데도 이 일을 반드시 맡아야 하느냐며?’고 또다른 질문을 던질 뿐, 한번 자신을 내어맡겨 볼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정말 힘든 케이스의 목자 앞에서 그래도 양심에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는 이상 순명해 보라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도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묻기만 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꺾는 실행을 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교지에 사람이 없다고 사제가 미사만 드려도 감지덕지라는데 섣불리 나서서 가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해도 저마다 제 자식은 성공하고 결혼해서 살아야 한다며 부둥켜 안고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색다른 삶의 길이 있다는데도 젊은이들은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성소의 길을 걷느냐고 함부로 나서지 않으려 합니다. 초대받은 이는 많지만 참여하는 이는 없는 셈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 모든 은총은 ‘실행하는 자들’의 몫이 됩니다. 나서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몫이 되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 훗날 주님과 함께 한지붕 아래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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