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목자는 길을 아는 존재입니다. 목초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서 양들을 그리로 인도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잃은 양을 찾아 길을 떠나기도 하며 이리의 공격에서 양들을 지켜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 지 알지 못했고 길을 잃어도 누구 하나 찾으러 오는 이가 없었으며 이리와 같은 사탄이 와서 물어가도 그 누구도 방어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에 ‘지도자층’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보다 더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지도자요 인도자라고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셈이었지요.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사람들을 이끌었고 결국 이끄는 이와 따르는 이 모두가 ‘율법주의’라는 구렁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그닥 변한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하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야 할 것 같다는 활동을 할 뿐이지요. 수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이 길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걷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영원한 허무로 나아가는 길이지요. 이런 저런 그릇된 가르침과 오류들이 사람들을 덮치고 있지만 그들은 괜찮다고 도리어 그런 가르침들을 따라가서 자신의 거룩한 영을 내어 맡기는 현실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손톱을 어떻게 칠하고, 입을 즐겁게 하는 음식을 어디서 팔며,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개선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는 열띤 논쟁을 펴면서 바로 자기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족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아가 수많은 이들은 길을 잃고 있지요. 신앙에 몸담는 이들도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해 걸어 나갑니다. 그저 주일미사나 지키면 되는 거라고 정해진 때에 정해진 활동을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고 착각하기 일쑤이지요. 새로운 형태의 율법주의가 파생되어 번져 나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길을 잃은 줄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길은 확고하다고 착각하고 있지요.
거기에 어둠의 영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서 사람들을 유혹해 내기 일쑤입니다. 얼마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점을 보고, 사주를 보고, 타로카드에 자신의 행운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형태를 바꾸어서 인터넷 상으로 온갖 아류작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이름으로 알아보는 성격 유형’이라던지 ‘좋아하는 색깔로 알아보는...’ 등등의 모든 것들로 불안한 자신의 여정에 뭔가 확고한 근거를 마련하고 싶어합니다. 가장 확고하신 하느님을 버려두고 현대의 우상을 섬기는 중이지요.
목자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이미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 안에서 드러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제자로 불러들이고 당신의 사명을 하도록 이끄십니다.
목자가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한 목자를 따르기 싫을 뿐이지요. 왜냐하면 참된 목자가 이끄는 방향은 목초지에 도달하기 까지는 성가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길을 아는 존재입니다. 목초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서 양들을 그리로 인도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잃은 양을 찾아 길을 떠나기도 하며 이리의 공격에서 양들을 지켜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 지 알지 못했고 길을 잃어도 누구 하나 찾으러 오는 이가 없었으며 이리와 같은 사탄이 와서 물어가도 그 누구도 방어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에 ‘지도자층’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보다 더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지도자요 인도자라고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셈이었지요.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사람들을 이끌었고 결국 이끄는 이와 따르는 이 모두가 ‘율법주의’라는 구렁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그닥 변한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하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야 할 것 같다는 활동을 할 뿐이지요. 수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이 길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걷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영원한 허무로 나아가는 길이지요. 이런 저런 그릇된 가르침과 오류들이 사람들을 덮치고 있지만 그들은 괜찮다고 도리어 그런 가르침들을 따라가서 자신의 거룩한 영을 내어 맡기는 현실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손톱을 어떻게 칠하고, 입을 즐겁게 하는 음식을 어디서 팔며,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개선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는 열띤 논쟁을 펴면서 바로 자기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족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아가 수많은 이들은 길을 잃고 있지요. 신앙에 몸담는 이들도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해 걸어 나갑니다. 그저 주일미사나 지키면 되는 거라고 정해진 때에 정해진 활동을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고 착각하기 일쑤이지요. 새로운 형태의 율법주의가 파생되어 번져 나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길을 잃은 줄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길은 확고하다고 착각하고 있지요.
거기에 어둠의 영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서 사람들을 유혹해 내기 일쑤입니다. 얼마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점을 보고, 사주를 보고, 타로카드에 자신의 행운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형태를 바꾸어서 인터넷 상으로 온갖 아류작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이름으로 알아보는 성격 유형’이라던지 ‘좋아하는 색깔로 알아보는...’ 등등의 모든 것들로 불안한 자신의 여정에 뭔가 확고한 근거를 마련하고 싶어합니다. 가장 확고하신 하느님을 버려두고 현대의 우상을 섬기는 중이지요.
목자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이미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 안에서 드러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제자로 불러들이고 당신의 사명을 하도록 이끄십니다.
목자가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한 목자를 따르기 싫을 뿐이지요. 왜냐하면 참된 목자가 이끄는 방향은 목초지에 도달하기 까지는 성가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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