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마태 12,6)
예루살렘에서 만난 성전 터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더군다나 2000년 전의 사람들이 바라보았을 그 성전의 위엄은 대단한 것이었겠지요. 여전히 수많은 유태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과거의 영화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성전보다 더 큰 이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 때문인데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외적인 성전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옷이 중요합니까? 몸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몸이 있어야 옷이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몸보다 옷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허례허식과 가식이 본질을 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유럽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성전들은 그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존재했지만 기도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한 한 사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엉뚱한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연필의 원래 용도를 모르면 그것으로 젓가락 삼아 국수를 집어 먹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 성전보다 더 큰 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가치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거대한 성전이 너무나 현란하고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에 주님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하느님의 영은 초라하기 그지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오늘도 헛된 것들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알아볼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기 싫은 것이지요. 왜냐면 나의 마음은 하느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 13,13)
예루살렘에서 만난 성전 터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더군다나 2000년 전의 사람들이 바라보았을 그 성전의 위엄은 대단한 것이었겠지요. 여전히 수많은 유태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과거의 영화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성전보다 더 큰 이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 때문인데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외적인 성전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옷이 중요합니까? 몸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몸이 있어야 옷이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몸보다 옷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허례허식과 가식이 본질을 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유럽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성전들은 그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존재했지만 기도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한 한 사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엉뚱한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연필의 원래 용도를 모르면 그것으로 젓가락 삼아 국수를 집어 먹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 성전보다 더 큰 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가치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거대한 성전이 너무나 현란하고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에 주님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하느님의 영은 초라하기 그지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오늘도 헛된 것들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알아볼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기 싫은 것이지요. 왜냐면 나의 마음은 하느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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