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7)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움일까요?
금요일에 고기를 먹었습니다. 죄입니까? 그럼 금요일에 십수만원 하는 고습 생선회 코스 요리를 사먹으면 죄가 아닐까요?
주일 미사에 빠졌습니다. 죄입니까? 그럼 주일 미사는 절대 빠지지 않으면서 주일 저녁마다 술을 진탕 마셔서 만취하는 것은 죄가 아닐까요?
과연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움일까요?
위의 예들에서 금요일에 고기를 먹어도 되고 주일 미사에 빠져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라는 보다 깊은 내면의 단계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향수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어딜 가나 향내를 풍기게 됩니다. 반대로 썩은 생선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어딜 가나 악취를 풍기게 되지요.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어떤 것을 지니고 사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향기로운 것으로 만들 수도 또는 악취가 풍기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희생제물’로 상징되는 것은 허례허식을 의미합니다. 즉, 그러한 행위를 하는 이들의 내면에 그 어떤 진정성도 없고 오직 이기적인 목적, 또는 과시하기 위한 목적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삶도 타인들이 자신을 아름답게 보아 주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외적인 형식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그 안에 어떤 진정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소경이라고도 하셨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라고도 하셨지요.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를 지닌 이, 즉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한 이는 자신의 의지에 향유를 간직한 사람이며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향기를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는 ‘법의 파괴자’로 보일 뿐입니다.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외적인 형식을 준수하는 형식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굳게 해 주는 것이지요.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쾌락의 행위를 해도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 누릴 걸 다 누리는 위선적인 그들을 외적으로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훌륭한 수단인 것입니다. 희생 제사를 드려 자신을 고귀한 신분으로 가장하고 내면에는 전혀 자비가 없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오직 단죄일 뿐이지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움일까요?
금요일에 고기를 먹었습니다. 죄입니까? 그럼 금요일에 십수만원 하는 고습 생선회 코스 요리를 사먹으면 죄가 아닐까요?
주일 미사에 빠졌습니다. 죄입니까? 그럼 주일 미사는 절대 빠지지 않으면서 주일 저녁마다 술을 진탕 마셔서 만취하는 것은 죄가 아닐까요?
과연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움일까요?
위의 예들에서 금요일에 고기를 먹어도 되고 주일 미사에 빠져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라는 보다 깊은 내면의 단계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향수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어딜 가나 향내를 풍기게 됩니다. 반대로 썩은 생선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어딜 가나 악취를 풍기게 되지요.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어떤 것을 지니고 사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향기로운 것으로 만들 수도 또는 악취가 풍기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희생제물’로 상징되는 것은 허례허식을 의미합니다. 즉, 그러한 행위를 하는 이들의 내면에 그 어떤 진정성도 없고 오직 이기적인 목적, 또는 과시하기 위한 목적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삶도 타인들이 자신을 아름답게 보아 주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외적인 형식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그 안에 어떤 진정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소경이라고도 하셨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라고도 하셨지요.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를 지닌 이, 즉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한 이는 자신의 의지에 향유를 간직한 사람이며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향기를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는 ‘법의 파괴자’로 보일 뿐입니다.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외적인 형식을 준수하는 형식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굳게 해 주는 것이지요.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쾌락의 행위를 해도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 누릴 걸 다 누리는 위선적인 그들을 외적으로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훌륭한 수단인 것입니다. 희생 제사를 드려 자신을 고귀한 신분으로 가장하고 내면에는 전혀 자비가 없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오직 단죄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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