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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에언자, 참 예언자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아모 7,12)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 7,15)

거룩한 직분에 종사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밥벌이로 거룩한 직분을 맡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밥벌이로 직분을 맡은 사람은 늘 더 나은 밥벌이를 찾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덜 힘들고 편안하고 안락하며 더 많은 이득을 내는 기회를 찾지요. 그리고 다른 이가 자신의 밥벌이를 위협하면 화를 내고 적개심을 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는 밥벌이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을 갈구하고 사람들의 중심이 되고자 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언제나 자신이 한 일을 광고하고 다닙니다.

반면,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더도 덜도 하지 않습니다. 딱 정해진 만큼, 자신이 받은 사명만큼 수행을 합니다. 물론 그것을 올바로 수행하면 주님께서는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주님이 바라는 종은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종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언제나 고난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난폭한 사람들에게 소외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묵묵히 그것을 참아냅니다.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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