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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쩌면 많은 경우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나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거룩함’이란 뭔가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지요. 적어도 손가락 하나를 도려내던지 심한 경우에는 생을 다 바쳐서 이루는 과업을 달성할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하느님이 원하는 거룩함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이 우리에게 심은 생각입니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대단한 업적을 드러내어야 훌륭한 사람으로 취급해 주겠다고 세상은 우리를 가르쳤지요. 그러면서 ‘거룩함’도 그렇게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거룩함에 도달하지 않으면 너희는 쓸모없는 인간이니 아예 시작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요. 즉, 세상의 궁극 목적은 거룩함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거룩함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저마다 하나의 풍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을 이룬다는 것은 풍선의 내부에 가벼운 공기를 채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요. 비록 풍선 자체의 무게 때문에 아직 위로 오르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가벼운 공기를 채워넣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풍선이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하고 훗날 ‘죽음’을 통해서 풍선이 터뜨려지는 순간 우리는 온전히 위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요. 행여 풍선의 무게를 극복할 정도로 우리의 영혼이 가벼워진다면 우리는 ‘기적의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정하시는 일이고 우리로서는 꾸준히 풍선 안에 가벼운 공기(선, 사랑, 진리, 온유, 친절, 선행, 자비 등등)를 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오직 ‘풍선’에만 집중하지요. 언젠가 터져 버리고 말 그 풍선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기를 넣기는 커녕 풍선에 덕지덕지 무언가를 붙여서 그 무게를 더하기만 합니다. 최악의 경우는 풍선 안에 더러운 것(탐욕, 이기심, 시기, 증오 등등)을 잔뜩 집어넣는 것이지요. 그래서 훗날 풍선이 터지게 될 때에 그 더러운 것들은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인들의 행적을 고스란히 본받으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분들이 간직했던 방향을 잊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매사에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공연히 이루지도 못할 성인의 삶을 롤 모델로 삼아 힘들어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길이 아닙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태한 상태로 성덕에 도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 안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품고 일상 안에서 다가오는 일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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