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식의 전수를 의미합니다. 교수가 가진 지식을 학생에게 전수해 주고 나면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도 일상적으로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시행합니다. 신문에서 제일 먼저 읽은 기사를 아직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곤 하지요. 하지만 사실 이는 정보의 전달이지 엄밀히 말해서 가르침이 아닌 셈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정보의 전달’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한 스승님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지니신 사랑을 당신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수했고 ‘부활’까지도 이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다른 가르침, 또는 다른 길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소위 ‘가르친다’고 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예수님에게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영을 바로 세워야 하지요. 가장 우선적으로 깊은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습득하는 모든 지식이 유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교회 안에서도 앞서의 가르침, 즉 ‘정보 전달’ 수준의 가르침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르는 교리 지식을 하나 더 배워서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이 흔히 하는 것이 족보싸움, 교리지식 논쟁 따위와 같은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누가 더 위대한가를 가리기 위해서 서로들 다툰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별로 닮지 않은 이들이 ‘가르침’만을 들고 서로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실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차라리 모른다고 했으면 덜 맞을 매를 벌고 있는 셈이지요.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면서 정작 가장 필요한 사랑의 가르침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르칠 수 있을 때는 오직 그분을 따라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때 뿐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정보의 전달’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한 스승님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지니신 사랑을 당신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수했고 ‘부활’까지도 이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다른 가르침, 또는 다른 길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소위 ‘가르친다’고 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예수님에게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영을 바로 세워야 하지요. 가장 우선적으로 깊은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습득하는 모든 지식이 유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교회 안에서도 앞서의 가르침, 즉 ‘정보 전달’ 수준의 가르침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르는 교리 지식을 하나 더 배워서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이 흔히 하는 것이 족보싸움, 교리지식 논쟁 따위와 같은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누가 더 위대한가를 가리기 위해서 서로들 다툰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별로 닮지 않은 이들이 ‘가르침’만을 들고 서로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실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차라리 모른다고 했으면 덜 맞을 매를 벌고 있는 셈이지요.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면서 정작 가장 필요한 사랑의 가르침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르칠 수 있을 때는 오직 그분을 따라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때 뿐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