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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시편 37,27)

아주 단순 명료한 삶의 지혜입니다. 그대로 행하면 길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악과 선을 구분하는 방법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여기에는 두가지 기준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과 선을 자신을 중심으로 분별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이 좋은 것은 모조리 선이고 자신이 싫은 것은 모조리 악이지요. 아주 간단한 논리입니다. 헌데 문제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의 이면에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당장 좋아 보이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망쳐 버리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우리에게는 당장 싫은 것이지만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들이 있습니다. 언뜻 좋은 돈벌이 기회가 생기는 것 같아 보여서 덥석 물었더니 우리에게 사기를 친 것이었고, 반대로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을 떠맡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나의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식입니다.

자기 자신을 선과 악의 기준점으로 삼는 이들은 반드시 넘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내면의 굳건한 심지를 올바로 지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고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번째 기준점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선과 악을 분별할 때에 비로소 올바른 기준점, 절대로 변하지 않는 기준점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나 사물, 사람을 두고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도움을 주는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사람은 그들의 선함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악한 사람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겪는 시련으로 우리가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반대로 세상적으로 좋아 보이는 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과하게 소유하거나 내가 점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언뜻 나에게 이득을 주는 것 같아 보이는 일이라도 나의 내면에 교만을 만들어 하느님에게 멀어지게 한다면 좋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두번째 기준점을 올바로 지니고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사물들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길이 사는 방법입니다. 물론 길이 산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지상에서의 장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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