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탈출 3,12)
모세에게 보증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즉, 다른 건 별로 보증할 게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즉, 이는 두가지를 말합니다. 세상적으로는 가장 초라한 보증이며, 신앙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보증인 것이지요.
하느님의 이 약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동일한 보증을 하시기 때문이지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 20)
세상 사람들은 이런 보증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아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확고하고 안정된 것인데 하느님의 보증을 받는 이들의 삶은 전혀 확고해 보이지도 안정되어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이보다 더 확고하고 안정된 보증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증한다는데 무서울 것이 없는 셈이지요.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무엇에 기초를 두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 편안함, 정신적 안정감’을 기준으로 확고함을 찾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뜻’에서 확고함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돈’, ‘드높은 명성’, ‘최고의 권력’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확고함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들은 ‘수단’이 될 수는 있을 지언정 전혀 확고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지요.
하느님의 보증을 믿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외적 형식을 받아들이는 이는 많아도 진정한 신앙을 살아가는 이는 참으로 부족합니다.
모세에게 보증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즉, 다른 건 별로 보증할 게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즉, 이는 두가지를 말합니다. 세상적으로는 가장 초라한 보증이며, 신앙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보증인 것이지요.
하느님의 이 약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동일한 보증을 하시기 때문이지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 20)
세상 사람들은 이런 보증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아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확고하고 안정된 것인데 하느님의 보증을 받는 이들의 삶은 전혀 확고해 보이지도 안정되어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이보다 더 확고하고 안정된 보증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증한다는데 무서울 것이 없는 셈이지요.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무엇에 기초를 두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 편안함, 정신적 안정감’을 기준으로 확고함을 찾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뜻’에서 확고함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돈’, ‘드높은 명성’, ‘최고의 권력’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확고함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들은 ‘수단’이 될 수는 있을 지언정 전혀 확고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지요.
하느님의 보증을 믿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외적 형식을 받아들이는 이는 많아도 진정한 신앙을 살아가는 이는 참으로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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