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예언서를 보면 마치 하느님이 변덕스러워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분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다른 내막이 있는 것일까요?
먼저 하느님의 진리의 속성을 바라봅시다. 그분이 지니고 계신 진리는 영원불변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바뀌면 과연 그것을 진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런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는 항구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진리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교회적 용어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영원히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 가운데 변함없는 한 가지 진리는 우리 교회의 4대 교리 중의 하나인 상선벌악입니다. 선을 행한 이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악을 행한 이에게는 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당신의 영원한 진리를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시면 됩니다. 그래서 조급할 필요가 없고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찰나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마치 하느님이 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하느님은 영원을 염두에 두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선은 상을 받고 악은 벌을 받습니다.
세번째,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또 선에 머물러 있다가 악으로 변질될 수도 있고 악에 머물러 있다가 선으로 회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해 주신 것으로서 가장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를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니고 있으면서 가장 근본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선과 악의 선택에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구도는 확실합니다. 하느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가 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근거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 됩니다. 인간의 죄악은 벌을 예비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것을 바로 처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은 영원을 지니신 선하신 하느님으로 인간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 처벌의 기회를 가능한 뒤로 미루십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진심으로 마음을 바꾸게 되면 그 처벌, 성경적 표현으로 재앙이 멈추어지게 됩니다.
또 다른 부분에서 성인들이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건 바로 성인들이 자신들을 내어바쳐 지금은 마음이 굳어져 있는 악한 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을 헌신하여 빛을 뿌려 주겠다는 결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그 성인의 마음을 보고 아직 악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당장 주어져도 시원치 않을 재앙을 잠시 멈추시는 것입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당신의 처벌은 죄를 지은 그 순간이 아니라도 영원 안에서 되갚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악인들을 보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간곡히 청하는 의인의 기도를 듣고 기회를 주시고 벌하시겠다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오락가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태초부터 이어져온 진리를 이행하실 것입니다. 다만 누군가가 아직 당신의 빛을 모르는 이들에게 빛을 전하겠다고 나선다면 그들을 위해서 기회를 선물해 주십니다.
화답송의 한 구절입니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댓글
우리는 신부님의 그 말씀에 아멘 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