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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영적 무기력

돌고 도는 물레방아가 하나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쇄작용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 지도 계층의 무기력이 존재합니다. 영적인 방향 설정을 해 줄 능력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전문 직장인’ 수준으로 시간이 갈수록 전락하는 느낌입니다. 심지어는 본당 사목구 주임도 하나의 ‘철밥통’이 되고 있습니다. 늘 하던 행사를 치르고 교회의 관리직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그런 교회의 지도층, 즉 교도권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평신도들도 무기력해집니다. 사실 신앙생활에는 조력자가 필요한 법인데 매주 교회로 나아가서 힘든 일상을 극복할 힘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 너무나도 고리타분한 ‘형식화된 전례’를 접하는 신자들은 그 영혼이 더욱 메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의 그런 메마른 신앙생활은 다시금 그들이 마주하는 교회의 지도층에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이 영적 메마름은 어느 한 계층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진전되어 온 만성 질병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지도층이 나오는 텃밭은 평신도들의 가정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성장 과정, 수련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신학생이 처음 가졌던 순진하고 뜨거운 열정이 신학생의 기간을 거치면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고착화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모습이 ‘상뚜스’로 비난받고 술 잘 마시고 행사를 잘 치르는 전문 인력이 인정받는 엉뚱한 분위기가 결국 엉뚱한 최종 결과물을 양산해 내는 셈입니다.

한국 교회의 영적 무기력은 비단 이 나라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 수많은 외국 선교사 사제들을 보아왔고, 그들에게서도 또 그들과 일하는 현지 주민들에게서 비슷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문화된 지식이 신앙을 쇄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엄청 발전을 하고 그에 관련한 논문들이 쌓인다고 신앙이 쇄신되는 것이 아니지요. 내면의 진정한 회개가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런 변화들이 모여 결국 교회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변하지 않은 분이시기에 결국 이 변화의 열쇠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의지 안에 이미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알아야 보려고 노력할 수 있고, 보아야 깨닫고 바꿀 수 있습니다. 알고, 보고, 깨닫게 된 이들은 마땅히 실천으로 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밀알은 땅에 묻혀 죽어야 싹이 자라는 법입니다. 누군가가 하겠지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의 근본은 나 자신의 결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기력하다고 혀만 찰 것이 아니라 ‘그럼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사제의 권위와 친분이 있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성당의 의무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다면 변화는 너무나도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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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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