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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행복의 연관성

저는 부자가 아닙니다. 저희 집도 부유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의 생각 같은 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켜봐 온 바를 바탕으로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는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부유하게 된다는 것은 일단 돈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많아지면 좋은 것은 ‘편안해진다’는 것이지요. 편안함의 근본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생각의 바탕이 존재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 불편해지기 때문이지요. 먹고 싶을 때에 냉장고에 오렌지 주스가 있어야 하고, 또 기왕이면 그것을 자신의 침대 있는 곳까지 가져다주는 시종이 하나 있으면 더 좋습니다. 그러면 편안하게 그 오렌지 주스를 즐길 수 있겠지요. 돈이 없으면 시종은 물론이거니와 고급 주스를 사먹을 수 없게 됩니다. 기껏해야 시장통에서 귤이나 몇 개 집어 먹을 수 있겠지요. 돈이 많으면 참으로 편안한 세상이 됩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소유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찬바람이 불어대는 추운 집에서 살 필요가 없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더위를 견딜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간단한 도식이 산출됩니다.

“부유함 =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기 = 편안함 = 행복”

“가난함 =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함 = 불편함 = 불행”

이것이 통상적인 도식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굉장한 의문을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유한 이들의 얼굴에서 생각만큼 ‘행복감’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정반대의 현실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곳에 선교 사제로 살면서 그들의 ‘소박한 행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제가 머무는 곳의 사람들은 정말 가난하고 없고 찌든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왜 그런가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게 가진 탓에 아주 작은 것에도 충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지요. 여기에서 저는 다른 도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 = 원하는 것을 하기”

“불행 =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함”

즉, 원래의 도식에서 ‘물질의 유무’와 ‘육신의 편안함’을 제외하더라도 행복과 불행의 도식은 성립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부자도 불행할 수 있고, 가난한 이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행복과 불행의 열쇠는 부의 유무에 영향을 받지만 절대적인 것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오렌지 주스를 먹지 못하고, 그것을 가져다주는 시종을 가지지도 못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시장통에서 귤을 사먹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애써 망각하고 살아온 것이지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갈 때에 행복합니다. 마치 제가 선교사로 살면서 행복하고,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치면서 행복한 것과 같지요. 고급 요리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갖 사치품에 둘러싸여 있으면 그러한 것들을 잠시 ‘누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제가 행복에 가득찰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물건’, 또는 ‘재화’라는 것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일용할 양식’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주님의 기도를 괜히 만드신 건 아닌 듯 싶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기왕이면’이라는 생각을 갖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갑니다. 지금의 삶을 누리지 못하면서 ‘이것만 가지게 된다면 행복해 질거야’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지요. 대학만 들어가면, 취직만 되면, 결혼만 하면, 자식만 잘 키우면, 노후 보장만 되면… 그러다가 생의 촛불은 꺼지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방향을 달리 잡았습니다. 사는 동안을 모조리 즐기기로 마음 먹었지요. 물론 그 말이 저에게 아무런 고통과 불행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행복은 행복대로 누리고, 불행에서는 앞으로의 행복을 위한 것을 예비하는 시간을 갖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기본적인 의식주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행복해 지기 위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제가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부유하지 않고 부유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서 일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아낌없이 베풀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필요한 만큼 충분히 먹을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을 보다 가난한 이들과 나누면서 그들의 행복 또한 곁들여 얻고 있습니다. 그러니 갈수록 행복이 더욱 커져 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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