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사고의 범주를 벗어난 행위입니다. 우리는 물의 성질을 잘 알고 있고, 우리 육신이 물에 빠져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지면 ‘죽음’에 이른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우리의 ‘상식적인 선’의 사고는 여기에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물 위를 걷는다는 생각은 일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 아니 물 위를 걸으려는 시도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따라서 상식적인 사고 체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반증하지요.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적의 근본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이 ‘하느님’과 그분을 향한 예수님의 전적인 의존을 제외한다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이 상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 당신의 눈에 드러나고 이미 배워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빵의 기적 때에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믿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신앙의 깊이는 우리가 ‘의심하면서 믿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분에게는 추호의 의심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마치 맑은 유리창처럼 하느님의 뜻이라는 빛을 그대로 투과시키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중적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때로 원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을 내면에 미리 정해 두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신기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내면이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해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 위에 예수님이 떠 있었다는 것에 놀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진정으로 순수했다는 것에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 아니 물 위를 걸으려는 시도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따라서 상식적인 사고 체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반증하지요.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적의 근본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이 ‘하느님’과 그분을 향한 예수님의 전적인 의존을 제외한다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이 상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 당신의 눈에 드러나고 이미 배워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빵의 기적 때에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믿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신앙의 깊이는 우리가 ‘의심하면서 믿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분에게는 추호의 의심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마치 맑은 유리창처럼 하느님의 뜻이라는 빛을 그대로 투과시키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중적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때로 원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을 내면에 미리 정해 두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신기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내면이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해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 위에 예수님이 떠 있었다는 것에 놀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진정으로 순수했다는 것에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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