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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는 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 (히브 3,12)

사람은 누구나 맑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어린 시절부터 쌍욕을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나 순진하던 그 시절에는 아예 ‘언어’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러가지 것들을 습득해 나가는 것이지요.

인간의 여린 마음에는 근본적으로 ‘신’에 대한 감각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도 일찍부터 서낭당에 물을 떠 놓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는 ‘영적 존재’에 대한 감각이 늘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그분이 누군지는 배운 만큼 알 수 있을 뿐이었지요.

하지만 인간이 성장하고 ‘자신의 것’이 늘어가기 시작하면서 결국 인간 안에 내재된 그 마음의 자리를 자기 스스로 다 차지해 버리게 됩니다. 즉 처음부터 영원한 존재, 나보다 뛰어난 존재를 위해서 마련되어 있었던 그 자리를 나의 탐욕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을 신앙적인 표현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최고인 사람, 자신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말하지요. 진정한 무신론자들인 셈입니다.

껍데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런 무신론자들은 가톨릭 신앙인들 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외형적으로 가톨릭 신앙인의 모습을 취했을 뿐, 실제 내면은 ‘무신론자’들입니다. 자신의 목구멍과 육의 안락이 중요한 부류들이지요.

눈 앞에 벽이 있는데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해서 그 벽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긴다고 해서 그분이 사라질 리가 없지요. 참으로 어리석은 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로서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기가 더 힘든데 말이지요. 우리가 마주하고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고 계획된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학적 교만이 스스로를 그런 결론으로 이끌고 자신의 의지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믿지 않음’은 많은 결과물을 양산합니다. 믿지 않는 마음에는 ‘가치들’이 올바르게 자리잡기도 힘든 법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의 출처는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열심히 ‘윤리’를 찾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의 이기심을 조정하는 행위를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서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를 지닐 수도 있지요.

가톨릭 사제라서 당연히 ‘믿자’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저 역시도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삶의 체험이 있고 선택이 존재합니다. 제가 처음부터 사제였던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고로 제 말이 아예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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