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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운명의 예언자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신명 18,20)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바로 속에 들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울고 뒤가 마려우면 울고, 또 기분이 좋으면 웃고 했지요. 그래서 ‘맑은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맑은 영혼을 지녔고 그것을 맑게 표현할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장하면서 우리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내면이 갈라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기분이 나빠도 웃어야 할 때가 있고, 나는 기분이 좋은데 분위기상 슬픈 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기분이 나쁘다고 결혼식에서 울상을 짓고 있을 수 없고, 내가 기분이 너무 좋다고 장례식장에서 쾌활하게 웃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지닌 생각은 보다 깊은 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근본 의도’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 영역은 ‘선의와 악의’의 두가지로 나뉩니다. 인간은 근본적인 선의와 악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외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근본 의도는 ‘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힌다는 식의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내면의 성령에 따라서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표현을 하며, 반대로 내면의 악한 영에 따라서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가장 최종적인 외면의 모습은 얼마든지 숨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의 가장 깊은 곳부터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 앞에서 속일 것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하느님 앞에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의 ‘의도’를 파악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처음의 성경 구절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 가장 깊은 ‘영’의 상태에 달린 것입니다. 가장 외적인 말마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 말의 상태를 구성하는 학적 지식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말을 시작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설령 하느님을 실수로 하너님으로 표현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근본 의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적는 이 글에도 틀린 띄어쓰기나 단어는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표현하려는 근본 의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지요.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정확한 표현을 쓴다고 해도 가장 근본의 의도가 틀려먹었다면 아무리 사탕발림의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말하라고 명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그분의 이름을 걸고, 또는 다른 신들(다른 권위들)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그 예언자는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나 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는 ‘영원의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만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어둠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제 무덤을 제 스스로 파는 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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