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마르 2,5)
제가 기도를 설명하면서 늘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신 게 아닙니다. 사실 중풍병자는 그들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혼자서 집에서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고 그를 치유와 구원에로 이끌었지요.
사실 ‘치유’는 덤이었습니다. 그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메말라 있었고 얼마나 고통 중에 있었을지 상상이 되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그의 몸의 병, 즉 중풍병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현대의 많은 이들도 비슷한 질병에 시달립니다. 그들의 육신이 아픈 이유는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합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요. 지금까지 병자들을 치유하던 예수님이 심각해 보이는 그 중풍병자 앞에서 병의 치유를 하지 않고 ‘용서’를 언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압니다. 스스로가 왜 아픈지, 어디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지 알지요. 적지 않은 현대인의 병은 ‘마음병’입니다. 과거의 죄책에 근거한 그 마음병은 미래의 불안과 걱정도 끌어오지요. 그래서 그의 육신도 덩달아 아픈 것입니다.
참된 죄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내면이 바로 설 때에 자동적으로 외면도 바로 서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사실 비만은 내적인 병입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습관, 입에 즐거운 것을 찾는 습관이 몸의 비대함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내면을 바로세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제가 기도를 설명하면서 늘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신 게 아닙니다. 사실 중풍병자는 그들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혼자서 집에서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고 그를 치유와 구원에로 이끌었지요.
사실 ‘치유’는 덤이었습니다. 그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메말라 있었고 얼마나 고통 중에 있었을지 상상이 되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그의 몸의 병, 즉 중풍병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현대의 많은 이들도 비슷한 질병에 시달립니다. 그들의 육신이 아픈 이유는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합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요. 지금까지 병자들을 치유하던 예수님이 심각해 보이는 그 중풍병자 앞에서 병의 치유를 하지 않고 ‘용서’를 언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압니다. 스스로가 왜 아픈지, 어디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지 알지요. 적지 않은 현대인의 병은 ‘마음병’입니다. 과거의 죄책에 근거한 그 마음병은 미래의 불안과 걱정도 끌어오지요. 그래서 그의 육신도 덩달아 아픈 것입니다.
참된 죄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내면이 바로 설 때에 자동적으로 외면도 바로 서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사실 비만은 내적인 병입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습관, 입에 즐거운 것을 찾는 습관이 몸의 비대함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내면을 바로세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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