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
옛부터 ‘대속’(대신 속죄함)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습니다. 죗 값을 대신 치른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결과가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 죄의 결과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대신 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문화 안에서는 ‘흑기사’로 표현되는 것을 꼽아볼 수 있지요. 해당하는 사람이 술을 마셔야 하는데 그 술을 대신 마셔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지극히 명료한 이유를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없애고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뭔가 폼나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듯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밝혀주는 예수님, 마치 가방의 악세사리 같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예수님의 이 ‘속죄’에 대한 능력이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지요. 헌데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예수님이 자신에게 별다른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어둠의 행실을 자행하지요. 세상에 젖어 살아가고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면서도 예수님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장님 상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또 메말라서 스스로의 어둠을 느끼지조차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한한 사랑의 근원이시요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실 예수님에 대한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져들고 말지요. 그 신앙의 형식은 자신의 사회생활을 위해서 필요할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져만 가고, 소외된 이들은 더욱 소외되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언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번번히 그 품을 벗어나고 말지요.
하느님의 어린양이 다시 다가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진정한 가치를 아는 이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부터 ‘대속’(대신 속죄함)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습니다. 죗 값을 대신 치른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결과가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 죄의 결과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대신 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문화 안에서는 ‘흑기사’로 표현되는 것을 꼽아볼 수 있지요. 해당하는 사람이 술을 마셔야 하는데 그 술을 대신 마셔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지극히 명료한 이유를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없애고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뭔가 폼나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듯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밝혀주는 예수님, 마치 가방의 악세사리 같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예수님의 이 ‘속죄’에 대한 능력이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지요. 헌데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예수님이 자신에게 별다른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어둠의 행실을 자행하지요. 세상에 젖어 살아가고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면서도 예수님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장님 상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또 메말라서 스스로의 어둠을 느끼지조차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한한 사랑의 근원이시요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실 예수님에 대한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져들고 말지요. 그 신앙의 형식은 자신의 사회생활을 위해서 필요할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져만 가고, 소외된 이들은 더욱 소외되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언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번번히 그 품을 벗어나고 말지요.
하느님의 어린양이 다시 다가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진정한 가치를 아는 이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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