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히브 11,1)
신앙생활을 꽤나 오래 했으면서도 여전히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거의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뭔지 모르는 상황. 문제는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고 또 알려주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있는 자리에 안주하려 한 데에 탓이 있고, 가르치는 권위(교도권)의 입장에서는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알려주려 해도 알지 못하면 알려줄 수 없고, 또 알고 있어도 다른 욕구들이 앞을 가로막아 알려주지 못하기도 하니까요. 사실 이 부분은 굉장히 복잡한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단순화시켜 생각하도록 합시다.
신자들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신앙생활에서 ‘공복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그들의 노력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적절한 도움을 주십니다.
교회는 가르쳐야 합니다. 본질적인 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올바로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주석하는 ‘학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신앙인들이 올바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들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 ‘믿음’은 무엇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이미 잘 설명했지만 좀 더 알아듣기 쉽게 풀이해 보도록 합시다.
사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믿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가게에 가서 점원에게 물건을 살 수 있는 이유는 그 가게의 점원이 별다른 항의 없이 물건을 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어느 특정 가게의 점원과 오랜 기간을 사귀다가 냉정하게 차 버린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날 무심코 다시 그 가게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몇 개 집어들었는데 옛날 자신이 그 점원에게 지독하게 냉정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그 여인은 집어든 그 물건을 들고 계산대에 들고 가기를 망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의 내면에 ‘저 점원은 나의 물건을 계산해주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일상적으로 만나고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엔가 가족과 다투고 나면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엇’이지요. 그것은 내가 ‘믿는 무엇’인 셈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아갑니다.
믿음이라는 것, 좀 더 분명하게 말해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세상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이고 우리는 이미 그 나라를 여기에서부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이 당신 외아들에게, 그리고 그 외아들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전해준 것으로서 지금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신앙의 대상들’입니다. 우리는 천주존재와, 삼위일체와, 강생구속과, 상선벌악을 믿습니다. 단순화된 표현이지만 하나하나의 구절마다 엄청난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이 믿음을 올바르게 지니고 있다면 그에게는 다른 이들이 전혀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돈을 엄청 지니고 있는 이들이 단순히 부러워 보이지 않고, 반대로 가난한 이들이 단순히 불쌍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응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과연 마지막 순간에 무엇이 드러나게 될까요? 세상은 진정 눈 앞에 드러난 것들 뿐일까요? 아니면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저는 믿어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단순히 그 외적인 모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말이지요. 특히나 인간의 내면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꽤나 오래 했으면서도 여전히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거의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뭔지 모르는 상황. 문제는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고 또 알려주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있는 자리에 안주하려 한 데에 탓이 있고, 가르치는 권위(교도권)의 입장에서는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알려주려 해도 알지 못하면 알려줄 수 없고, 또 알고 있어도 다른 욕구들이 앞을 가로막아 알려주지 못하기도 하니까요. 사실 이 부분은 굉장히 복잡한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단순화시켜 생각하도록 합시다.
신자들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신앙생활에서 ‘공복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그들의 노력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적절한 도움을 주십니다.
교회는 가르쳐야 합니다. 본질적인 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올바로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주석하는 ‘학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신앙인들이 올바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들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 ‘믿음’은 무엇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이미 잘 설명했지만 좀 더 알아듣기 쉽게 풀이해 보도록 합시다.
사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믿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가게에 가서 점원에게 물건을 살 수 있는 이유는 그 가게의 점원이 별다른 항의 없이 물건을 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어느 특정 가게의 점원과 오랜 기간을 사귀다가 냉정하게 차 버린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날 무심코 다시 그 가게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몇 개 집어들었는데 옛날 자신이 그 점원에게 지독하게 냉정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그 여인은 집어든 그 물건을 들고 계산대에 들고 가기를 망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의 내면에 ‘저 점원은 나의 물건을 계산해주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일상적으로 만나고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엔가 가족과 다투고 나면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엇’이지요. 그것은 내가 ‘믿는 무엇’인 셈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아갑니다.
믿음이라는 것, 좀 더 분명하게 말해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세상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이고 우리는 이미 그 나라를 여기에서부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이 당신 외아들에게, 그리고 그 외아들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전해준 것으로서 지금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신앙의 대상들’입니다. 우리는 천주존재와, 삼위일체와, 강생구속과, 상선벌악을 믿습니다. 단순화된 표현이지만 하나하나의 구절마다 엄청난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이 믿음을 올바르게 지니고 있다면 그에게는 다른 이들이 전혀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돈을 엄청 지니고 있는 이들이 단순히 부러워 보이지 않고, 반대로 가난한 이들이 단순히 불쌍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응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과연 마지막 순간에 무엇이 드러나게 될까요? 세상은 진정 눈 앞에 드러난 것들 뿐일까요? 아니면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저는 믿어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단순히 그 외적인 모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말이지요. 특히나 인간의 내면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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