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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성장과정

기초는 ‘하느님의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면 아무리 신앙에 대해서 설명해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느님은 계십니까? 하느님을 증명해 내면 사실 하느님이 아니게 됩니다. 하느님은 어느 그릇에 담길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증명할 방법은 없는가? 아닙니다. 그분의 발자취는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이라고 우길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선택은 그들 스스로 책임질 것입니다. 그들 역시도 우연의 산물에 불과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도 영혼도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도 없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가련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들이지요. 그들이 가만히 제자리에 머무른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초대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기틀이 잡히고 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얼마나 받아들일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사람은 무언가를 안다고 그 즉시 실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짖는 소리를 들은 아이에게 그것이 줄에 묶인 작은 강아지의 소리라고 알려줘도 두려움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만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는 얼마든지 많을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믿는가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누구는 겨우 주일미사나 빠지지 않을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 하면 다른 누구는 주님에게 진정으로 헌신할 믿음, 타인들이 뭐라고 비난해도 길을 바꾸지 않을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에 합당한 실천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와 동시에 합당한 실천이 뒤따르게 됩니다. 믿음과 실천은 자연스레 이어지는 결과물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믿음을 온전히 갖추더라도 그것을 드러낼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굉장히 드문 경우(비오 신부님이 13년간 공적으로 미사 집전을 하지 못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믿는 만큼 실천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 부분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문제들입니다. 어느 대학생은 시험을 소중히 여겨서 자신이 수락한 교리교사 직분을 소홀히 하는가 하면, 다른 누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일상에서 고난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물론 어느 교사들은 교사회 회식 술자리를 지키느라 집안에서 꾸중을 듣고도 자신이 마치 신앙을 위해 헌신한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이 커지고 실천이 이어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처음엔 단순한 문제이던 것이 신앙이 깊어갈수록 그 수준이 심화되게 됩니다. 물론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때로는 홀로 고독과 싸워야 할 때도 있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험난한 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체험을 하기도 하고, 극심한 오해와 편견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난이도가 높은 만큼 은총의 그릇이 커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수난의 잔’을 피하려고만 하지요.

그러다보면 인생이 훅 갑니다. ‘현세’라고 불리던 것이 사라지고 말겠지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준비한 것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준비해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변명할 여지도 없게 되지요.

간단하게 정리했지만,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마다 겪는 방식과 정도가 미미하게 다르기 때문이고 이렇게 도식화된 삶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는 무척이나 복잡하고 다양하게 연계되어 벌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찾아오는가 하면 그 안에 기쁨이 있고, 기쁨이 지속되는가 하면 어느 샌가 문제가 찾아오고… 그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꾸준히 가야할 길을 걸어가는 이는 차츰 차츰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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