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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변화

비판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변화를 꾀하는 것이지요. 비판만 하면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습니다. 행동을 시작해야 하지요. 하지만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분별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행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을 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한 법이지요.

그럼 무엇을 분별해야 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사실 수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이 보이고, 그런 신자들에게 뜨거운 열정을 전하지 못하는 사목자들이 보입니다. 사목자의 권위와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수도자들도 보이고 돈과 명예에 길들어가는 고위층도 보입니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 신앙에 다가오는 세속적인 사람들과 연애를 하기 위해서 모임에 나오는 청년들도 보입니다. 그러한 모든 움직임 가운데 ‘하느님의 부재’가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안에 하느님이 없습니다. 앙꼬 없는 찐빵이지요. 팥 앙금 없는 붕어빵입니다.

하느님을 다시 불어넣는 작업. ‘성령’을 불러 일으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메마른 가슴에 단비를 뿌리는 작업, 꺼져가는 심지를 다시 지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런 작정을 하니 다시 눈에 보이는 게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좋은 강좌를 하고 좋은 글을 남깁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얼마든지 그런 기회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좋은 수단으로 가진 생각들을 금방 나눌 수 있고, 이역 만리 떨어진 곳의 사제의 강론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실천’의 부재입니다.

서로들 똑똑한 머리로 읽기만 합니다. 읽고 또 읽어 머리가 점점 커지는데 ‘실천’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허한 말잔치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잘 살자고 하는데 잘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자고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지요. 용서해야 한다고 말만 하고는 여전히 미워합니다. 나누자고 하면서도 나눌 줄 모르지요. 이기적인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습니다. 머리는 잔뜩 커져서 터질 것 같은데 몸은 빈약한 외계인 같은 모양의 사람들이 돌아 다닙니다. 금방 눈을 뜬 소경이 본 것처럼 죽은 나무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성령은 ‘두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실천 속에서 본격적인 힘을 얻습니다. 사실 믿음은 자동적으로 실천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믿는다 하고 외쳐대는 행위는 악마도 할 수 있는 짓입니다. 어둠의 영이 어둠의 영인 이유는 하느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너무도 잘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의 변화, 그것은 내적 쇄신과 외적 쇄신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우리는 내면으로 거룩해져야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교회는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 한탄만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차라리 방청소라도 시작하는 것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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